´무쇠인생 41년´ 대장장이 정대봉씨

입력 2010.09.08 12:04  수정

수원 ´동래대장간´ 대장장이의 두터운 손바닥은 무쇠장인 증명서

동래대장간의 정대봉씨, 강인한 인상과 두터운 손은 대장장인의 증명서로 보였다
수원천변 수원사 옆에 허름한 ´동래대장간´이라는 빨간색 페인트로 쓴 60년대의 간판이 있다. 그 밑에는 동래철공소가 쓰여있지만 가게안은 예전의 대장간 모습 그대로다.

지난 3일 찾은 대장간에는 벌겋게 달군 화덕에 벌초용 조선낫이 벼루어지고 있었다. 대장쟁이 정대봉(60)씨가 달군 무쇠를 집게로 잡아서 모루 위에 얹어놓고 강약을 조절하며 두들기면 원하는 연장으로 모양이 나기 시작한다. 정씨의 이마에는 이내 굵은 땀방울이 맺힌다.

불에 달군 쇠를 두드리고 펴면서 물속에 넣었다가 다시 달구어 내는 비법의 과정을 여러번 거치는 담금질로 단단한 조선낫이 만들어진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따라서 아들과 함께 답사를 다니는 친구가 숲이 우거진 산길을 다니기에는 조선낫이 달린 지팡이를 만들어 다니면 좋을 것 같다며 찾은 곳이 동래대장간이다. 작은 나뭇가지는 손잡이에 감춰진 낫으로 베어내며 길을 나간다고 했다.

이곳은 수원에서 오래된 유명한 대장간이라고 한다. ‘아저씨! 지난번에 만든 것으로 2개만 더 만들어 달라’고 친구가 주문한다. 나무지팡이에 소형 낫을 끼워넣고 낫에는 나무 덮개를 씌우면 낫과 지팡이로 겸용하므로 효용성이 뛰어날 것 같다.

정대봉씨가 미니낫을 그라인더에 갈고있는 모습

물푸레나무 자루에 끼워 넣기 위해 미니 낫을 불에 달궈서 쇠를 망치로 두드려 작게 다듬고 그라인더에 갈더니만 뚝딱 만들어낸다. 직경 4cm가량의 물푸레나무를 짜구로 다듬고 나무가 갈라지지 않게 정수리에 쇠로 만든 뚜껑을 먼저 씌우고, 낫의 손잡이 부분에 10여cm가량 깊이로 끼워 넣는 게 보통 솜씨가 아니다.

프로가 일하는 모습은 단박에 눈에 띄게 마련이다. 정씨의 아내가 옆에서 지켜보는데 든든한 신뢰의 눈길을 보인다.

“올 10월이면 만41년입니다. 저도 한 때는 용인의 농기계회사 공장장으로 70명의 부하직원이 있었고, 일본으로 출장을 많이 다녔다” 는 그의 말에는 자부심과 강함이 담겨있었다. 고향 떠난지 40년이 지났지만 정씨의 말투에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그대로 남아있다. 쇳덩이처럼 무뚝뚝한 대장쟁이가 말문을 여니 거침없이 인생의 이력이 풀어진다.

형님의 친구가 그 공장에 있어서 입사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직장이 있다면 신분보장을 뜻한다. ´성실하게 일하면 저절로 윗사람이 알아본다´며 시골 촌놈이 수도권으로 와서 아침에 남보다 먼저 출근하여 굳은 일을 스스로 찾아했더니 제작실습은 다른 사람은 입사 2년 후부터 했으나 정씨는 6개월만에 망치를 잡게 했다고 회고했다.

친구가 만든 지팡이 겸용 소형 낫, 나무덮개로 손잡이를 별도로 만들었다. 벌써 주문을 6개나 받았다고 한다. 특허신청을 했다고 한다

정씨는 공장장 대장장이가 하는 일을 잘 살핀 눈썰미 덕분에 남들보다 빨리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배우려는 자세와 의지가 윗사람의 마음에 들었을 것 같다.

초등학교만 나온 정대봉 씨가 고등학교, 전문대를 나온 사람을 통솔하려면 쇠를 다루는 기술과 능력, 넉넉한 마음씨가 있어야 부하들이 따라온다며 대장장이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회상했다.

정씨는 “그래도 한평생 후회 없이 살았어요. 두 아들을 대학까지 공부시켜 결혼시키고 아파트 사주고 했어요. 자식들도 잘 따라 주었다”며 미더워한다.

정씨는 23살에 동갑내기 부산 처녀와 결혼했다. 형님의 소개로 서울에서 만났는데 첫눈에 반했단다. 첫사랑 얘기는 언제 들어도 솔깃하고 재미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만 15년을 운영했다고 한다. 이곳은 처삼촌 고 김봉달씨가 40여년간 운영했던 대장간이었다. 수원의 대표적인 재래시장 지동시장 인근에 위치한 대장간으로 각종 칼과 낫, 호미, 괭이, 도끼, 쇠스랑, 망치 등의 다양한 연장을 만든다.

동래대장간에 진열된 제품들, 연장의 손잡이에는 인두화로 낙관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사라져가는 귀한 대장간이다. 인구 110만인 수원시에 대장간이 3군데뿐이라고 한다. 정 씨는 “이곳을 찾아온 단골손님이 내가 없으면 얼마나 실망하겠느냐” 며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서라도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언제나 가게 문을 연다”고 말했다. 주로 주문식 연장을 많이 만들어준다며 은근한 자랑이다.

철들자 평생을 대장간을 하며 위험한 작업장에서 일했지만 그동안 화상이나 다른 사고가 없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이래봬도 3군데 TV방송에도 나왔다며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때마침 손님이 찾아와 재단용 가위를 갈아달라며 내민다. 재단용 칼의 상태를 자세히 살피드니 망치로 살살 다듬고 나사를 풀어 맞추고 사정없이 그라인더와 숯돌에 갈더니만 다 됐다며 손님에게 준다.

가위는 아무나 못한다며 비싼 미장용 가위와 일본 사무라이칼, 무속인의 작두, 병장기 등 별의별 물건을 만들었다며 나를 인정해주는 단골 고객들이 많다며 이들을 위해서라도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겠다며 대장쟁이 직업에 대한 애착과 열정이 느껴졌다.

정씨를 얼른 보면 50대 초반의 나이로 보인다. 저도 한때는 빼입고 나서면 인기가 좋았다며 힘이 장사라 씨름대회, 팔씨름 등을 많이 했다며 손바닥을 보여준다. 무쇠인생 대장쟁이의 두터운 손바닥은 무쇠 장인의 증명서로 보였다.

‘물려줄 사람은 있는지요?’라며 답이 뻔한 질문을 툭 던졌다. “누가 이렇게 힘든 일 배우고 합니까?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며 말하는 동래대장간 정씨의 아쉬운 푸념이 마음에 앙금처럼 남았다.[데일리안 경기 = 박익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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