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매입 대금 지급기한 60일→35일 단축 추진
中企단체 “발주 축소·판로 위축 부작용 우려”
학계도 “정산 속도보다 거래 안정성 살펴야”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티메프 사태' 재발을 막고 중소 납품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추진되는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정작 중소상공인과 입점업체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상품대금 지급 기한을 일률적으로 줄일 경우 유통업체의 운전자금 부담이 커지고, 그 여파가 중소 납품업체에 대한 발주 축소와 판로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유사한 제도를 추진했던 해외에서도 시장 부작용을 이유로 제도를 보완하거나 입법 방향을 수정한 사례가 있는 만큼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코리아스타트업포럼과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 한국중소상공인협회 등 중소상공인·입점업체 관련 단체들은 잇따라 성명을 내고 지난 1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위원회를 통과한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의 재검토를 요구했다.
개정안은 매출 1000억원 이상 유통업체의 직매입 상품대금 지급 기한을 현행 60일에서 35일로 줄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백화점 등에서 주로 활용하는 특약매입·위수탁·임대을 거래의 지급 기한도 현행 40일에서 20일로 단축한다.
관련 단체들은 중소 납품업체의 자금 부담을 덜겠다는 입법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실제 시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산 시점이 앞당겨지면 유통업체가 이전보다 많은 운전자금을 확보해야 하는 만큼 발주 규모를 줄이거나 신규 거래에 보다 보수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판매 실적이나 시장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중소기업과 신생 브랜드가 우선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약 2900개 회원사를 둔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은 "정산 기간 단축이 납품업체의 단기 유동성을 개선하는 한편, 직매입 플랫폼의 운전자본 부담이 증가할 경우 장기적으로 상품 다양성이나 중소 납품업체와의 거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 "상품판매대금의 지급 기한을 단축하는 방식이 모든 거래구조에서 동일한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닌 만큼 제도의 목적뿐 아니라 실제 시장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영향 역시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유통업체의 자금 부담이 늘어날수록 신규 상품이나 수요 예측이 어려운 제품의 매입을 줄일 가능성이 있고, 이 과정에서 판매 이력이 부족한 신생 브랜드와 스타트업의 시장 진입 기회가 위축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은 "국회가 법안의 취지를 유지하면서도 시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보다 정교한 보완 방안을 함께 논의해 주기를 요청한다"고 했다.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 역시 지급 기한 단축이 중소 납품업체의 매출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을 제기했다.
협회는 "대금 지급기한 단축 강제는 유통업체들의 유동성 부담을 급증시켜 결국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발주량 축소로 직결된다"며 "중소업체들에겐 며칠 빠른 정산보다 안정적인 발주 물량 확보가 생존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직매입은 유통업체가 납품업체로부터 상품을 직접 사들인 뒤 재고 부담까지 떠안는 방식이다.
지급 기한이 기존 60일에서 35일로 줄어들면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상품 판매를 통해 현금을 회수하기 전에 납품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경우가 늘어날 수 있다.
업계에서는 이에 따라 유통업체들이 재고 회전이 빠르고 판매 가능성이 높은 대형 브랜드를 선호하는 대신 상대적으로 수요 예측이 어려운 중소 브랜드 제품 매입에는 소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고 우려한다.
유병준 서울대 교수 연구팀 등에 따르면 정산 주기를 20일로 단축할 경우 대형·중소업체 간 양극화 지수가 2.4배 증가하고, 중소 납품업체의 시장 피해 규모가 연간 12조~21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한국중소상공인협회도 "국회는 국내 유통 생태계의 기반을 흔드는 섣부른 입법을 즉각 철회하고, 시장의 현실과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전면 재검토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직매입 거래 자체가 줄어들 가능성도 제기된다. 유통업체가 재고와 자금 부담을 낮추기 위해 직매입 대신 실제 판매된 상품을 기준으로 대금을 지급하는 특약매입이나 위수탁 방식의 거래 비중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오히려 중소 납품업체의 거래 조건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특약매입은 직매입에 비해 유통사와의 교섭력 격차가 커 불공정 거래 행위 발생 빈도가 높아 중소업체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고 말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보고서에 따르면 거래액 1000억원당 불공정 행위 발생 빈도는 특약매입이 44.24건으로 직매입 2.1건의 약 21배 수준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유통업체가 재고 부담을 줄이는 과정에서 판매되지 않은 상품의 반품이 늘어날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해외서도 지급기한 규제 놓고 진통…업계 "획일적 적용 신중해야"
해외에서도 중소기업의 자금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대금 지급 기한을 단축하는 정책을 도입하거나 추진했지만 시장의 반발과 부작용을 겪은 사례가 있다.
칠레는 2019년 기업 간 거래의 최대 지급 기한을 30일로 제한하는 이른바 '30일 결제법'을 도입했다.
이후 유통업체들이 단기간 내 판매 가능성이 낮은 중소기업 제품의 발주를 줄이고 대기업 제품을 확대하면서 중소기업 제품 구매 비중이 11%포인트 감소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납품가격 인하 압력이 커지는 등의 부작용도 제기됐다.
결국 칠레는 거래 당사자 간 합의가 있을 경우 30일을 넘겨 대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마련했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벌어졌다.
유럽집행위원회(EC)는 2023년 기업 간 거래의 지급 기한을 기존 60일에서 30일로 단축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 벨기에 등을 중심으로 획일적인 지급기한 규제가 오히려 중소기업과의 거래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반발이 제기됐다.
업계에서는 해외 주요 유통기업들이 상품의 특성과 재고 회전율 등을 고려해 비교적 탄력적으로 대금 지급 기한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 미국 아마존과 월마트는 최대 90일, 일본 이온그룹은 최대 60일, 중국 다룬파는 90~120일 수준의 지급 기한을 두고 있다는 설명이다.
학계도 부작용 우려…"정산 속도보다 거래 안전성 살펴야"
전문가들은 티메프 사태의 원인과 상품대금 지급 기한을 구분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티메프 사태의 핵심이 판매대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대규모 미정산으로 이어진 데 있는 만큼 단순히 지급 기한을 앞당기는 것만으로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동일 한국유통학회 명예회장은 "티메프 사태는 자금 흐름 관리 실패로 인한 시장 신뢰 훼손이 원인이지, 정산주기 설정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급 기한을 일률적으로 줄이는 데 집중할 경우 오히려 유통업체가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거래 대상을 선별하면서 중소기업 제품의 시장 진입 장벽이 높아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산의 '속도'보다 거래의 '안정성과 자율성'에 방점을 둬야 한다"며 "유럽 등 해외에서도 기업의 규모와 산업, 특성, 거래 유형에 따라 예외 사항을 폭넓게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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