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 확산세…물류망 위기 재고조
원유·전력·수출까지 韓 경제 직접 영향
반도체 의존 강한데 AI 거품론까지
전쟁 상황 따라 경제 전반 성장 좌우
ⓒ클립아트코리아
미국과 이란의 군사 충돌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세계 반도체 산업에도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공급망과 물류, 에너지, 경기 흐름에 가장 민감한 산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물류비 급등과 에너지 가격 상승, 글로벌 정보기술(IT) 수요 둔화가 동시에 나타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 경제는 반도체 수출 회복을 중심으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늘어나면서 수출 증가세를 견인하고 있다.
산업통상부 ‘5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반도체 수출은 371억5천만불로 169.4% 급증하며 월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새로 썼다. 반도체는 14개월 연속 해당 월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 중이다.
3개월 연속 수출액 300억 달러 고지를 밟은 반도체는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역대 최고 수준인 42.3%까지 늘렸다. 반도체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과거 20% 전후에 머물다가 지난해 24.4%로 늘었고, 올해 들어 절반 가까이 치솟고 있다. 그만큼 우리 경제의 ‘반도체 쏠림’ 현상이 어느 때보다 심화한 셈이다.
반도체 단일 종목 의존도가 높다 보니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현실이 되면 대한민국 경제 성장세는 예상보다 빠르게 둔화할 수 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걱정거리는 글로벌 물류 차질이다.
중동은 세계 해상 물류 핵심 요충지다.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원유 수송의 관문이다. 홍해 역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주요 항로다. 한국은 원유 수입 70%를 중동에 의존한다. 전쟁터가 넓어지면서 이들 항로 안전이 위협받으면서 선박들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우회하기 시작했다. 희망봉 우회는 운항 거리를 늘려 운송 기간은 물론 운임과 보험료를 끌어올린다.
반도체 산업은 수백 개 협력업체가 촘촘하게 연결된 초정밀 공급망 위에서 움직인다. 웨이퍼와 포토레지스트, 특수가스, 장비 부품 가운데 하나라도 제때 공급되지 않으면 생산 일정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코로나19 당시 공급망 붕괴가 반도체 부족 사태로 이어졌던 경험은 글로벌 물류 안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물류 정체보다 더 큰 문제는 에너지 가격 급등이다. 반도체 공장은 하루 24시간 가동되는 대표적인 전력 다소비 시설이다.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비롯한 첨단 생산설비는 막대한 전력을 소모한다. 미세공정이 고도화될수록 전력 소비도 증가하는 추세다.
인공지능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반도체도 결국 ‘전력’ 기업
에너지 가격 영향력 커
중동 전쟁으로 국제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면 전기요금 상승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은 전력망 60% 이상을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다. 원유 가격 상승은 반도체 원가를 올린다. 단순히 반도체를 비싸게 팔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가격 상승은 언제든 수요 하락 가능성을 유발할 수 있다.
반도체 기업이 현재 AI 시장 확장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상황에 생산비 부담마저 늘어나면 전체 수익성은 떨어질 가능성이 큰 점도 고려해야 한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반도체 기업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공정에 사용되는 초고순도 화학물질과 산업용 가스, 각종 소재를 생산하는 협력업체들도 같은 영향을 받는다. 결국 공급망 전반의 비용이 오르면서 최종 제품 가격 경쟁력도 약화할 가능성이 있다.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큰 변수는 글로벌 수요다. 전쟁이 계속되면 유가 상승은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각국 중앙은행은 금리 인하에 더욱 신중해질 가능성이 높다. 고금리와 고물가 장기화는 소비 심리를 빠르게 위축시킨다.
스마트폰과 PC, TV 등 IT 기기는 경기 침체 국면에서 가장 먼저 소비가 줄어드는 품목이다. 글로벌 소비가 위축되면 메모리 반도체 수요도 함께 감소한다.
최근 반도체 시장을 이끄는 AI 분야 역시 예외는 아니다. 빅테크 기업이 경기 불확실성을 이유로 데이터센터 구축이나 AI 시설 투자를 늦추면 고성능 메모리와 AI 반도체 수요 증가세도 주춤하게 된다. 게다가 최근에는 천문학적인 투자 규모에 비해 유의미한 수익 창출이 어렵다며 ‘AI 거품론’까지 대두되는 상황이다.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1센터 선임연구위원은 지난달 18일 ‘2026년 중동 지정학 충격과 한국 공급망 위험의 변화’ 보고서를 통해 공급망 위험은 모든 품목에 균등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전략 중간재를 중심으로 집중되는 ‘선별적 병목’ 구조를 보인다고 진단했다.
특히 “4월 기준 공급망 위험은 일부 전략 중간재를 중심으로 집중되는 양상을 보였으며, 특히 반도체 제조장비, 전기·전자부품, 유기·무기화학 소재 등 제조업 핵심 중간재에서 높은 위험 신호가 관찰된다”고 분석했다.
정 선임위원은 “이는 일부 전략 품목의 병목현상이 제조업 전반의 조달 부담과 생산 차질 위험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결국 중동 전쟁의 영향은 단순히 국제유가 상승에 그치지 않는다. 물류망 불안과 제조원가 상승, 글로벌 IT 수요 위축, 연구개발 차질이 동시에 발생하는 ‘복합 충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반도체가 한국 수출과 경제성장을 떠받치는 핵심 산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중동발 지정학적 위험은 한국 경제 전체 성장세를 좌우할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AI 호황이라는 긍정적 요인만으로는 상쇄하기 어려운 외부 충격이 현실화할 경우, K-반도체는 또 한 번 공급망 회복력과 위기 대응 능력을 시험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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