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은 반도체·디스플레이 한정?
병원·조선·방산은 점검 사각지대
업계 "일반산업용 공급 빠르게 악화"
최보윤 "비반도체 분야 전수 점검해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지난 달 13일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주사기, 수액제 포장재를 생산하는 에이디켐테크 공장을 방문, 수급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헬륨 수급에 문제가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내놨지만, 실제 판단 대상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종에 한정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병원·방산·조선 등 비반도체 분야를 중심으로 공급 차질 우려가 급속히 번지는 가운데 정부가 반도체 대기업 중심의 수급 상황을 산업 전반의 안정으로 과대 해석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7일 국민의힘 최보윤 의원실이 산업통상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헬륨 등 주요 소재에 대해 상반기까지 수급 문제가 없을 전망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지난달 23일 정부가 '헬륨 수급에 문제가 없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서 "헬륨 수급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대상 업종은 반도체, 디스플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반도체, 디스플레이 제조 과정의 냉각제로 쓰이는 헬륨의 경우 지난해 한국 수입의 64.7%를 카타르에서 들여와 중동 의존도가 높지만, 현재 대체 수입선 확보 등을 통해 수급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파악했다는 의미"라고 부연했다.
의료, 방산, 연구 등 타 업종에 대해서는 "분야별 소관 부처의 요구에 따라 대응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헬륨 수급 차질 사례가 확인된 바 없다"고 했다. 사실상 비반도체 분야의 물량과 재고를 직접 점검한 것이 아니라, 관련 부처나 업계에서 공식적으로 올라온 차질 사례가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든 셈이다.
또 "유통기업 재고 1개월,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 재고 3개월은 기업별 자체 재고 기준에 따른 것"이라라며 "국내 공급망은 개별 수요 기업이 국내외 유통사를 통해 헬륨을 공급받는 구조로, 유통사별 공급 가능 물량을 정부가 파악하기 곤란하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현재 중동 전쟁 관련해 정부는 범부처 비상경제 대응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국내에서 생산되는 석유화학제품에 대해 수급위기 발생 시 보건·의료, 생활필수품, 핵심산업 등에 필요한 중요 품목 생산에 우선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중동 정세 불안으로 공급망 위기가 불거진 석유화학 원료·제품에 대한 매점매석 금지 조치를 시행한 지난 달 15일 서울 시내 한 시장에 폴리에틸렌 및 폴리프로필렌 등 중간재가 진열돼 있다. ⓒ연합뉴스
이같은 답변은 정부의 헬륨 점검이 반도체·디스플레이 중심에 머물렀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해당 업종의 자체 재고와 대체 수입선은 확인했지만, 병원 MRI·조선·방산·연구기관 등 비반도체 수요처가 5월 이후 실제로 얼마만큼의 헬륨을 공급받을 수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산업부는 "국내 생산 없이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헬륨의 경우, 수급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비해 KOTRA를 통해 대체 수입선을 발굴하고 필요한 기업에 안내하고 있다"며 "중동 전쟁이 장기화되면 헬륨 수급 불확실성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나 미국 등 중동 이외 지역에서 생산이 증가하고 있어 대체 수입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보윤 의원은 "정부가 '헬륨 수급에 문제가 없다'고 단정했지만, 실제 판단 대상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한정됐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병원 MRI·방산·조선·연구기관 등 비반도체 분야의 공급 가능 물량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산업 전반이 안정적인 것처럼 발표한 것은 매우 안이한 대응"이라고 질타했다.
한화오션 거제조선소 야드 ⓒ연합뉴스
MRI 멈추고 LNG선 납품 막히나…현장의 비명
업계의 판단도 정부와 달랐다. 정부가 말한 수급 안정은 반도체 등 대형 수요처를 중심으로 한 해석에 가깝고 병원·방산·조선·연구기관 등 비반도체 수요처는 이미 점검 사각지대에 놓였단 것이다. 산업부가 직접 확인한 대상이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에 집중된 만큼, 일반산업 현장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단 비판까지 나온다.
헬륨 공급업계 관계자는 "산업부의 설명은 반도체 분야에 한정해서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반도체 업계는 3월 초 중동 상황 악화 이후 긴장 상태였으나, 현재는 미국산 헬륨으로 대체가 이뤄져 공급 이슈가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면서도 "다만 이는 반도체 중심의 판단이며, 일반산업 시장은 상황이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에 따르면 카타르산 물량은 사실상 크게 막힌 상황이다. 국내 수입은 지난해 기준 카타르가 약 65~70%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미국·러시아 등이 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카타르산의 80~85% 이상은 반도체 쪽으로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관건은 일반산업용 물량이다. 해당 수요는 전체의 약 30% 수준인데, 이 중 러시아산 비중이 지난해 기준 약 37%에 달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카타르발 차질에 러시아 수출통제까지 겹치면 일반 수요처의 공급 여력은 체감상 30~40% 수준까지 쪼그라들 수 있다는 게 업계의 판단이다.
해당 품목은 반도체뿐 아니라 의료·방산·조선에서도 대체가 어려운 필수 소재다. MRI 장비는 초전도 자석 냉각을 위해 액체 상태로 사용한다. 최근 신형 장비는 사용량이 줄었지만, 중소 병의원에서 운용 중인 구형·중고 장비는 여전히 정기적인 보충 수요가 있다.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될 경우 병원 현장의 MRI 운용 차질도 배제하기 어렵다.
조선업계도 예외가 아니다. 헬륨은 선박 용접과 안전검사 등에 쓰인다. 특히 LNG 화물창 건조를 맡는 중소 조선 기자재업체의 경우 납품 전 최종 안전 점검 단계에서 헬륨을 사용해야 한다. 물량 확보가 막히면 검사 지연을 넘어 납품 일정 자체가 밀릴 수 있다는 있다는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헬륨은 선박 용접, 안전검사 등에 필수적으로 활용되는 원자재로 전량 외국에서 수입해오고 있다"며 "대량으로 쓰이지는 않지만 필수적으로 활용되는 원자재로,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수급 불균형 사태가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LNG 화물창 건조를 맡는 중소 조선 기자재업체 같은 경우, 납품을 앞둔 최종 안전 점검 단계에서 필수적으로 헬륨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를 거치지 못할 경우 LNG 화물창 납품 자체가 막힐 가능성도 우려되고 있다"고 짚었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달 15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한국백신에서 중동전쟁 대응 주사기 공급망 구축 협약식을 마치고 주사기 생산라인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반도체'만 챙긴 산업부, 비반도체는?
정부 대응의 허점은 비반도체 현장을 직접 포착하기 어려운 파악 체계에서도 드러난다. 병원 MRI용 헬륨 부족은 병·의원에서 병원협회, 복지부나 식약처 등 관련 부처를 거쳐 산업부로 전달되는 구조다. 개별 병원이나 중소업체의 공급 차질이 산업부의 직접 점검망에 곧바로 잡히기 어려운 셈이다.
헬륨 공급업계 관계자는 "현재 상태가 지속될 경우 병원 쪽 수급 대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내다봤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정부가 반도체 대기업의 안정 여부만으로 전체 헬륨 수급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우선 공급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 아래 단계에 있는 병원·조선 기자재업체·방산 부품업체 등은 이미 가격 급등과 공급 배정 축소를 체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관련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는 어떻게든 물량을 맞추려 하겠지만, 일반산업용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문제없다'는 발표가 아니라 병원, 방산, 조선, 연구소 등 비반도체 분야의 실제 재고와 월별 필요 물량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유통사별 공급 가능 물량을 파악하기 어렵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산업부가 주요 헬륨 생산·유통업체와 직접 확인하면 현장의 심각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며 "정부가 반도체 밖 산업 현장의 위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최보윤 의원은 "헬륨은 의료 현장의 MRI 운용은 물론 방산·조선·연구 분야에서도 대체가 어려운 핵심 소재인 만큼, 일부 대기업 수급만 보고 '문제없다'고 할 사안이 아니다"라며 "산업부는 즉시 관계 부처와 함께 비반도체 분야의 실제 재고와 월별 필요 물량, 공급 차질 사례를 전수 점검하고, 수급 악화 시 의료·방산·핵심산업에 대한 우선 공급 기준과 비상 대응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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