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바탕 뮤지컬 '렘피카'서 주인공 타마라 드 렘피카 역
6월 21일까지 서울 코엑스아티움서 공연
"부상에도 공연 생각...'렘피카'는 생존이었다"
"50대 여배우의 책임감, 후배 여배우들에 멋진 선례됐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네모난 캔버스밖에 없다’. 그 말 자체가 타마라이자, 지금 무대에 선 제 모습인 것 같아요.”
지난달 21일 코엑스아티움에서 개막한 뮤지컬 ‘렘피카’는 20세기 초 아르데코 양식의 거장 타마라 드 렘피카의 삶을 조명한다. 아시아 초연 무대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 김선영은 지난해 12월 팔 골절 수술을 받았다. 이번 무대는 부상을 딛고 돌아온 그가 캐릭터의 여정을 통해 자신의 생존을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작품은 러시아 혁명 이후 파리로 망명한 타마라가 겪는 처절한 현실을 다룬다. 그녀는 단순히 예술적 야망에만 매몰된 인물이 아니라, 실존을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는 입체적인 면모를 지녔다. 김선영은 이런 타마라를 구축하기 위해 실존 인물의 그림과 자료를 접목하며 긴 여정을 시작했다.
“아시아 초연이라 참고할 모델이 없는 상태에서 실존 인물의 그림과 대본을 접목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타마라는 대중에게 친숙한 인물도 아니고, 우리가 흔히 아는 영웅담을 가진 주인공도 아닙니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인물을 미화해 관객의 사랑을 받고 싶은 유혹도 있었으나, 저는 오히려 그녀의 삶을 생존을 향한 투쟁 그 자체로 비추고 싶었습니다.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타당성을 찾아가는 여정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 같습니다.”
김선영이 연기하는 타마라는 예술 세계관을 단순히 순수 예술에 머물게 두지 않는다. 처참한 망명 생활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의 그림을 어떻게 이미지화하고 브랜드화해 팔 것인지 고민하는 지독하게 현실적인 인물이다. 작품은 1막과 2막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그녀가 성공 가도를 달리며 야망에 사로잡히는 변화를 포착한다.
“타마라는 추구하는 예술관이 뚜렷하지만, 그것이 생존의 수단이기도 한 모순적이고 복잡한 인물입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출발이 성공으로 이어지면서 욕망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절박함이 깔려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기심으로 비칠 수 있겠으나,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파리라는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명력이었다는 타당성을 갖고 연기하려고 합니다.”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극의 긴장감은 타마라의 절대적인 뮤즈 라파엘라와 남편 타데우스 사이의 갈등에서 폭발한다. 레이첼 채브킨 연출은 역동적인 음악과 시각적 장치를 통해 인물들이 겪는 혼란을 쉴 틈 없이 몰아치며 관객을 극 속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2막의 주요 넘버 ‘스피드’를 기점으로 타마라가 가졌던 모든 것을 잃어가는 과정은 무대 위에서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라파엘라는 타마라에게 단순한 연인을 넘어 자신의 인생을 투영하는 거울이자 억눌린 예술적 재능을 발현시켜 준 생존의 뮤즈였습니다. 그녀를 통해 발견한 예술적 갈망이 곧 유명세와 연결되는 복잡한 정서를 담아내려 노력했습니다. 2막에서 모든 것을 잃으면서도 또 살기 위해 누군가를 붙잡는 모순된 상황이 곧 인간의 본모습이라 느꼈고, 이 지점이 관객에게 복잡한 질문으로 와닿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은 관객에게 명확한 답이나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주지 않는다. 대신 첫 장면부터 노파가 된 엔딩까지 타마라는 끊임없이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았나’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현대인들에게도 삶의 정당성에 대한 묵직한 화두를 던지는 장치가 된다.
“완벽한 인간이 아닌, 후회하고 방황하며 스스로에게 답을 줄 수 없는 모습이 타마라에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정당성을 찾으려 몸부림치지만 결국 설명할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 있죠. 관객들이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렇겠구나’하며 공감하는 시간을 가지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번 공연의 넘버들은 배우들 사이에서 ‘극악’이라 불릴 만큼 가창의 난도가 높고 가파른 호흡을 요구한다. 화가로서의 강렬한 정서와 상대 캐릭터와의 팽팽한 호흡이 끊임없이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선영은 지난해 말 수술 이후 재활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연습에 임하며 육체적, 심리적 한계를 시험했다. 이 무대를 위해 임했던 시간이 그에겐 또 다른 의미의 ‘투쟁’이었던 셈이다.
“재활 중이라 연습량이 부족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컸지만, 배우로서의 생존이 이 작품이 달려있다는 절박함이 저를 움직이게 했습니다. 작품이 저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면 재활이 더뎠을 거예요. 아픈 것을 티 내지 않으려 했던 외로운 여정이었지만, 무대에 오르면서 점차 적응해 나가는 ‘무대 체력’을 발견하면서 한계를 극복하고 있습니다.”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데뷔 30년 차를 맞이한 김선영은 평소 자신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만큼은 그 인물이 되어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지금껏 버티게 했다. 이러한 배우의 철학은 평범했던 여성이 극한의 상황에서 비범한 아이콘이 된 타마라의 삶과 기묘한 일치감을 이룬다.
“저는 무대를 내려오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타마라 역시 처음부터 비범했던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 보니 비범한 아이콘으로 보여지게 된 인물이라고 봅니다. 일상의 저와 무대 위의 저를 제3자의 입장에서 분리해 보려 하는 경향이 타마라의 복잡한 내면과 달마 있는 것 같습니다.”
김선영은 5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타이틀 롤로서 무대를 책임지며 후배들에게 길을 제시하고 있다. 체력적인 부담을 느끼면서도 이 무대를 완수하는 것이 여배우들에게 ‘멋있는 역할’을 남겨주는 일임을 인지하고 있다. 뮤지컬이라는 외길을 넘어 드라마, 영화 등 연기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영역을 넓힐 계획도 밝혔다.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할 나이에 타마라를 맡게 되어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역할을 완수해서 좋은 선례가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 피날레에서 ‘세상을 바꿀 수 없어’라고 노래할 때, 저만 아는 승리감을 느끼며 끝맺음을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뮤지컬이라는 ‘외길’에 고집을 두지 않고고 연기자로서 즐겁게 활동할 수 있는 다양한 장르로 영역을 계속 넓혀갈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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