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금'인 반도체 산업, 정책 불확실성으로 흔들지 말아야
용인 반도체클러스터 공사 현장 전경. ⓒ용인시 제공
반도체 클러스터 이전을 둘러싼 논쟁이 최근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정치적 언어가 앞서면서, 급기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전북 새만금으로 옮기자는 주장까지 공개적으로 등장했다. 정부는 "이전을 검토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지만, 논쟁이 한 번 불붙자 불확실성은 좀처럼 꺼지지 않는다.
문제는 이 이슈가 '산업'의 언어로 정리되지 않는 데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공장 부지 하나로 성립하지 않는다. 장비·소재·부품 협력사, 숙련 인력, 연구개발 거점, 그리고 전력·용수 인프라가 한 덩어리로 엮인 생태계다. 기업이 수십조·수백조 원을 깔고 들어가는 사업에서 가장 무서운 변수는 비용이 아니라 시간이고, 시간은 결국 정책의 일관성과 입지의 확정성에서 나온다. 정치권이 "어디로 옮길 수 있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기업의 투자 시계는 느려지고 협력사의 의사결정도 흔들린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강제 이전을 추진할 계획이 없고, 기업 입지는 기업이 판단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이전론'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논쟁이 산업 논리로 출발한 게 아니라, 선거를 앞둔 표심의 언어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치권에서는 '전력·용수 리스크'를 이유로 "분산 배치가 근본 해법"이라거나 "대부분이 아직 계획 단계라 입지 변경이 가능하다"는 주장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접근은 논점을 뒤집는다. 전력·용수 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 '이전'이라는 처방을 정당화하는 만능 키가 아니다. 전력망이 병목이면 전력망을 어떻게 확충할지, 용수가 불안하면 어떤 계획과 비용으로 안정화할지부터 제시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은 '재배치'가 아니라 '확정된 로드맵'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지금 논쟁은 로드맵을 내놓기보다, 입지 자체를 흔들며 논쟁의 장만 키우고 있다.
산업 현장에서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지역 균형 발전도 중요하지만 지금 모습은 국가의 미래를 걸고 도박을 거는 꼴"이라며 정부가 원론을 넘어 산업 신뢰를 담보할 지침을 줘야 한다고 토로했다. 결국 이전이 현실화되지 않더라도, '이전설'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산업 전체가 치르는 기회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정책이 흔들리는 국가에 글로벌 공급망이 장기 베팅을 하긴 어렵다.
반도체 클러스터 논쟁에서 지금 필요한 건 더 큰 구호가 아니다. "옮길 것이냐 말 것이냐"의 싸움이 아니라, 전력·용수·인허가·교통·주거·인력을 묶어 언제까지 무엇을 확정할지 못 박는 일이다. 반도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정치가 지도 위에서 점을 옮기는 동안, 경쟁국은 공정을 앞당기고 고객을 선점한다. 흔들리는 건 '지역'이 아니라 '국가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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