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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79>] 석방


입력 2023.02.01 14:01 수정 2023.02.01 14:01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제79화 석방


일각이 여삼추 같은 시간이 흐르고 나자 배석인이 마담의 안내를 받으며 룸에 들어섰다. 강동욱과 김석규는 재빨리 일어나 최대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배석인이 앉으라는 손짓을 보내자 김석규는 곁눈질을 하며 맨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우리 대학 동문이시라고요?”


“예, 김석규입니다.”


김석규는 악수를 청하는 배석인의 손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 조심스럽게 잡았다. 마담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익숙한 솜씨로 폭탄주 석 잔을 말아 배석인의 앞에 놓더니 다소곳하게 룸을 빠져나갔다. 배석인이 술잔 하나씩을 두 사람 앞으로 밀고는 잔을 치켜들었다.


“우리 대학과 동문의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배석인과 강동욱이 원샷으로 폭탄주를 들이키는 걸 보며 김석규는 순간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술을 마실 수도 안 마실 수도 없는 얄궂은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김석규가 머뭇거리며 잔을 들고 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잔을 깨끗이 비운 상태였다.


“한잔 안 하시고 뭐해요?”


강동욱이 은밀한 눈짓으로 배석인 쪽을 가리키며 김석규를 채근했다. 김석규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부장검사라던 강동욱의 말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러자 배석인이 화통하게 껄껄 웃으며 손수 폭탄주를 말아 또다시 잔을 건넸다. 배석인이 한 번 더 높이 잔을 치켜든 상태로 말문을 열었다.


“강 검사, 김 선생이 우리 동문이니까 다시 한 번 잘 검토해봐. 내가 봐도 우리가 좀 과했어.”


“잘 알겠습니다. 적극 검토하겠습니다.”


강동욱이 잘 조련된 졸개처럼 잔을 치켜든 채 머리를 조아렸다.


“자, 후배님, 한잔 합시다, 쭉.”


배석인의 언질에 김석규는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 자리에서 배석인의 비위만 잘 맞추면 조만간 풀려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기는 것이었다. 김석규는 기대감을 품은 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술잔을 쭉 비웠다. 그렇게 몇 순배 돌고나자 김석규는 기분 좋은 취기가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술을 끊은 지 3년이 다 되었는데도 몸은 온전히 알코올을 기억하고 있었다.


“난 검사장님과 미팅이 있어서 이만 일어날게요. 강 검사, 선배님 잘 모셔!”


“예, 그럼 먼저 가십시오.”


강동욱과 김석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깍듯하게 배석인을 배웅했다. 배석인이 나가자 이번엔 민완구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취기로 긴장이 풀린 김석규는 민완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담이 야릇한 미소와 함께 미모의 아가씨 두 명을 데리고 룸에 들어 왔다. 짙은 향수와 화장을 하고 미니스커트를 착용한 아가씨들은 약속이나 한 듯 교태가 묻어나는 몸짓으로 김석규에게 다가가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몸을 밀착시켰다.


김석규가 강주 교외의 미천(美川) 시골집으로 다시 돌아온 건 아주 늦은 가을이었다. 돌이켜보면 J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나간 이후로 거의 2년만의 귀로였다. 예전 살갑게 대하던 동네 노인들은 김석규의 귀로를 축하해 주는 게 아니라 슬금슬금 피해버렸고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한 시골집은 폐허처럼 황량하게 변해있었다. 김석규는 겨우내 시골집을 정리하고 보수하며 쓰라린 속을 달래야 했다.


김석규가 강동욱의 음모에 빠져 강남의 고급 룸살롱에서 양주를 마시고 대취한 다음날 대한민국 1등 신문 K일보는 김석규의 룸살롱 사진을 1면 톱으로 실어 대서특필했다. 웃통을 벗어던진 채 묘령의 아가씨들과 낯 뜨거운 스킨십을 하는 장면이었다. 여성들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김석규는 맨 얼굴 그대로 나와 있었다. 사진 아래엔 구속 수감 이후에도 흥청망청 술을 마셨다는 담당검사의 양심고백을 설명이랍시고 달아놓았다.


담당검사의 진술에 의하면 김석규는 금주운동가에 어울리지 않게 구속 이후 금단현상이 극심했다고 한다. 그건 한마디로 금주하지 않는 금주운동가라는 증거였다. 김석규는 조사 과정에서 단식과 묵비권을 행사하며 술을 요구했고 담당검사는 대학후배라는 핸디캡과 원활한 조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부득이하게 음주를 허용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김석규는 평소의 술버릇대로 접대부가 있는 고급 술집만을 전전했고 취중 행실이 나빠 성도착에 버금가는 행위를 서슴없이 하더라는 것이었다.


K일보의 특종은 대한민국을 들쑤셔놓았다. 한때 금주운동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김석규가 사실은 금주를 해본 적도 없는 지독한 술고래였고 더욱이 술만 마시면 여자를 밝히는 도착증 환자였으며 구속 수감된 이후에도 술을 마시기 위해 걸핏하면 대학후배인 담당검사를 겁박했다는 언론보도 앞에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또한 이중적인 금주운동가 행세를 하며 경제적 이득까지 취한 파렴치범이었다는 단정적 기사는 거의 확인사살이나 마찬가지였다.


K일보의 특종을 신호탄으로 김석규에 대한 언론의 마타도어는 장마철 소나기 퍼붓듯 쏟아졌다. 급기야 김석규는 대한민국 역사상 이완용 다음으로 가장 나쁜 놈이 되고 말았다. 간혹 피의자와 술자리를 함께한 담당검사의 일탈을 지적하는 언론도 있었지만 그 기사는 금주운동가 김석규의 엽기적인 음주행각에 묻혀 제대로 이슈화 되지 못했다. 덕분에 강동욱은 징계 하나 받지 않고 영전해 나갈 수 있었다.


그 사단이 있고 한 달쯤 지나서 김석규는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는데 김석규가 시급하게 처리해야 했던 일은 박미옥과의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이었다. 그동안 박미옥은 언론의 마타도어에 세뇌된 주변인들이 자신을 김석규와 동일시하는 바람에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갈 수 없었다.


“어떠냐, 살만 하냐?”


임봉식을 태우고 택시를 몰고 온 이철백이 뒷좌석에서 막걸리와 파전을 꺼내놓으며 물었다. 방선희가 마련해준 것들이었다. 김석규는 삼발이 밥상을 펼치며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옥인 잘 지내냐?”


“응, 박 계장은 그럭저럭.”


임봉식이 곁눈질을 하며 나지막이 대꾸했다.


“이제 금주운동은 완전히 물 건너 간 거냐? 왜 다시 술을 먹고 그래.”


이철백이 막걸리 잔을 채워주며 김석규를 타박했다.


“선희 씨 음식솜씨는 여전해. 블랙&화이트는 잘 되지?”


“말 돌리지 말고, 진짜 술 안 끊을 거야? 다시 한 번 금주투쟁 해야지.”


“나 말고도 할 사람 있잖아.”


“누구?”


“내 도플갱어 말이야, 종탁이.”


김석규의 말에 두 사람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박미옥과 임봉식은 시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계속 해나갔고, 방선희는 금주운동이 김석규의 파렴치한 돈벌이 수단이었다는 언론의 친절한 설명에 음주인구가 원상회복되어 블랙&화이트 매출이 쭉쭉 올라가서 쾌재를 불렀다. 또한, 이철백은 개인택시를 사서 다시 운전대를 잡았으며, 한종탁은 3년 전에 김석규가 그랬던 것처럼 정신요양원에 입원하여 금단증상으로 힘겨워하고 있었다.


ⓒ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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