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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명대사㉙] 하마구치 류스케를 통해 만난 안톤 체호프(드라이브 마이 카)


입력 2022.10.03 09:31 수정 2022.10.03 16:12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포스터 ⓒ이하 ㈜트리플픽쳐스 제공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포스터 ⓒ이하 ㈜트리플픽쳐스 제공

똑같은 작품이 다르게 읽힐 때가 있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청년이 중년이 되면 전혀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처한 상황과 감정이 다르면 단 며칠 새에도 새롭게 들린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대사들에 이런 뜻이 담겼던가, 새삼 놀라며 오래된(1897년, 19세기 말 발간) 희곡을 다시 읽게 한 영화가 있었으니 ‘드라이브 마이 카’(감독 함구치 류스케, 수입 영화사 조아·㈜트리플픽쳐스, 배급 ㈜트리플픽쳐스)이다.


영화를 본 많은 평론가와 관객이 ‘인생영화’라고 칭송하는 영화, 각자 극찬의 이유와 지점이 다를 터이고 이 모두를 존중한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자체가 지닌 훌륭한 점, 필자가 느낀 감동과 감탄의 지점 모두를 얘기하는 건 아니다.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시작으로 세계적 비평가협회들의 수상을 지나 제작국인 일본을 넘어 영국과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영화에 더 이상의 호평은 무의미하다.


단지 영화에 나오는 대사 몇 마디에 관해 얘기하고자 한다. 평소 천재와 명작은 우리 눈에 이미 익숙한 것을 새롭게 제시할 수 있는 사람과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같은 맥락에서, 19세기 ‘바냐 아저씨’의 깊숙한 뜻을 21세기로 끌어올린 명화로 ‘드라이브 마이 카’를 각인시킨 대목을 짚고 싶다. 아니, 말을 바꾸어야겠다. 이미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체호프가 ‘바냐 아저씨’에 담은 ‘삶의 의미’를 간파한 독자는 숱했을 것이니, 깨달음 더딘 필자에게마저 ‘바냐 아저씨’를 새로이 데려다준 영화 대사에 관한 얘기다.


나와 당신의 상처를 피하지 않고 마주보기 ⓒ 나와 당신의 상처를 피하지 않고 마주보기 ⓒ

우선,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2021)를 보고 싶었던 건 하마쿠치 류스케의 신작이라서였다. 5시간 30분 길이의 영화 ‘해피 아워’(2015)가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게 사람과 사람, 네 여자의 이야기를 평범한 듯 기묘하게 이어나가며 현대의 사회와 가족과 인간의 문제들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덤덤히 웅변했던 천재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사실, 서점 매대에 서서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 그 맨 앞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소설이 원작인지도 모른 채 보기 시작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비틀즈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므로, 하마구치 류스케 식의 ‘드라이브 마이 카’겠거니, 괴념치 않았다.


영화를 선택하는 데에 상영 시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번엔 3시간의 러닝타임으로 다가선 ‘드라이브 마이 카’. 5시간 반을 겪어봐서가 아니라 실로 집중해서 따라갈 수밖에 없는 흡인력으로 벌써 3시간이 지났다는 게 놀라울 만큼 하마구치 류스케는 관객을 꽉 붙들었다.


따스한 신체접촉과 소통의 부재가 가져오는 현대인의 상실과 가족의 파괴에 주목하게 했던 ‘해피 아워’, 이번에는 더 깊이 들어간다. 신체접촉의 과정에서 드라마 극본을 쓰고 극적 이야기를 짓는 관계 속에서도 진정한 소통은 부재하고 상처는 치료되지 못한 채 보류되고 연기되며 인생은 벼랑 끝으로 몰린다.


지독한 불안과 고독을 어디까지 몰고 가려나 싶게 조용히 질주하는 ‘드라이브 마이 카’에 ‘바냐 아저씨’의 대사들이 불안한 인생과 인간의 고독을 증폭시키고 깊이를 더한다. ‘바냐 아저씨’의 대사들은 영화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해 들린다. 남자주인공 가후쿠가 바냐 아저씨로 출연한 연극이 도쿄에서 상연되기도 하고, 달리는 차 안에서 가후쿠가 그의 아내 오토가 녹음한 목소리와 대사를 주고받기도 하고,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연출하는 ‘바냐 아저씨’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대본 연습이 진행되고, ‘체호프의 대사를 읽으면 내가 끌려 나온다’며 한사코 출연을 거절하던 가후쿠가 결국은 바냐 아저씨가 되어 히로시마 무대에 올라 다시금 상연되기도 한다.


절정의 고독, 오토 역의 배우 키리시마 레이카 ⓒ 절정의 고독, 오토 역의 배우 키리시마 레이카 ⓒ

처음엔 그저 눈으로 읽을 때와 다른 ‘낭송’의 매력에 매료됐다. 영화에 고전적 풍미를 드리우고 캐릭터를 풍성하게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바냐 아저씨’ 속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드라이브 마이 카’ 인물들의 말이 되었을 때, 책 속의 글들이 영화 대사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기묘한 순간이 찾아왔다. 내가 직접 발화하여 낭송하지 않았음에도, 영화 속 가후쿠의 말처럼 체호프의 대사들이 내 안의 나를 끌고 나오는 경험이었다. 일테면 이 대사가 그랬다.


“진실이 어떻든 간에, 지금처럼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모르고 있는 것보단 덜 불안할 거야.”(엘레나, ‘바냐 아저씨’)

“내 생각에 진실은 무엇이든 그리 두렵지 않아. 가장 두려운 건 그걸 모르는 거야.”(오토의 낭독)


희곡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의 조카 소냐는 의사 아스트로프를 사랑한다. 마음 착한 소냐는 오매불망 아스트로프를 그리워하는데, 그녀를 괴롭히는 건 ‘못생긴 나를 좋아할 리가 없어’라는 생각이고, 더욱 괴로운 건 아스트로프가 과연 내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불안감이다. 누굴 만나도 자신도 모르게 아스트로프 얘기를 꺼내던 소냐는 새어머니 엘레나에게도 마음을 터놓는다. 엘레나가 자신이 그의 마음을 확인해 주겠노라고 장담하며 하는 말이 바로 이 대사다. 소냐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게 승낙하면서도 모르는 채로 놔두는 게 그나마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갈등한다.


희곡에서는 외사랑에 빠진 소냐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 늙은 남편을 두고 젊은 의사에게 끌리는 엘레나가 진정 소냐를 위해선지 소냐를 핑계 삼아 아스트로프 마음의 향방을 확인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얄미움이 느껴졌던 대사다. 그런데 영화로 옮겨와 오토의 목소리로 낭독되자 전혀 다른 심상이 형성된다. 오토는 분명 배우인 남편 가후쿠의 연극 연습을 위해 희곡을 녹음해 준 것인데, 오토가 처한 상황과 심경이 이 대사에 인생의 처절함을 배어들게 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가후쿠 역의 배우 니시지마 히데토시 ⓒ 이야기를 끌어가는 가후쿠 역의 배우 니시지마 히데토시 ⓒ

영화 속에서 오토와 가후쿠 부부는 네 살 난 딸을 폐렴으로 잃었다. 오랫동안 침잠하던 오토는 어느 날 남편과의 성관계에서 스토리를 말하기 시작했고 관계의 절정에서 이야기의 압권을 뽑아냈다. 다음날 남편은 스토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들려줬고 아내는 이를 메모해 극본을 썼다. 딸을 잃고 배우 일을 중단했던 아내는 그렇게 극작가가 되었고, 남편은 더욱 열심히 아내의 이야기를 기억해서 전했다.


두 사람은 출근길 차 안에서도 한 문장씩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스토리를 완성해 갔다. 아내마저 잃을까 두려웠던 가후쿠는 이야기를 짓는 것으로 아내가 상처를 극복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아내를 잃지 않은 것으로 상처를 피했다.


심지어 가후쿠는 아내가 출연 배우들과 외도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더 이상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아내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공허함이 끝없이 자랐다. 아내는 빈집에 들어가는 도둑 소녀 이야기를 통해 ‘이제는 그만 들켜서 멈추고 싶다’는 뜻을 남편에게 전했지만, 남편은 모른 척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바냐 아저씨’의 대사가 놓이니, 엘레나의 대사가 오토의 고백이 되니 ‘진실이 무엇이든 그리 두렵지 않다. 가장 두려운 건 그걸 모르는 것이다’라는 말에 담긴 절박함이 뼈저리게 전해 온다. 오토를 두렵게 한 건 다른 남자를 갈망하는 자신의 공허보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남편의 존재다. 외도라는 진실은 스스로 잘 알지만, 상대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오토를 잡아먹는 두려움이 된다.


공허 그 자체를 형상화 한 미사키 역의 배우 미우라 토코(앞) ⓒ 공허 그 자체를 형상화 한 미사키 역의 배우 미우라 토코(앞) ⓒ

비단 오토와 가후쿠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진실이 무엇인가’보다 그것을 모르는 것이 더 두려운 상황들이 엄존한다.


그것이 가습기 소독제 등과 같은 사회적 이슈이든 연인의 사생활이든 진실을 모른다는 게 두려움을 키운다. 알면 대책을 세우든 받아들이든 할 수 있지만, 모르면 불가능하다. 특히나 사람 마음에 관한 일은 오토처럼 상대가 알기를 바랄 때도, (반대로)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순간들의 진실을 알고 싶을 때도 모른다는 자체가 두려움을 키운다. 그저 궁금증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알게 되면 내 마음을 다칠 비극적 진실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부정적 상상이 두려움을 키운다. 두려움은 관계를 깨트리고 사람을 삼킨다.


두려움은 오토를 삼켰다. 더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던 가후쿠는 딸을 잃은 상처를 모른 척하고, 아내의 상처를 외면했는데 ‘거꾸로’의 선택이었다. 딸을 잃은 자신의 상처에 직면해야 했고, 아내의 상처를 마주보아야 했고, 더더욱이나 아내를 잃었을 때 더 이상 도망가지 말아야 했다. 가후쿠는 타지 히로시마까지 도망쳤지만,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이었다. 아내의 외도남 다카츠키가 배우로 오디션을 보고, 자신과 똑같이 가족에 대한 죄의식을 지닌 미사키를 운전기사로 만나게 된다.


“나는 제대로 상처받아야 했어” ⓒ “나는 제대로 상처받아야 했어” ⓒ

그것은 화가 아니라 다행이고 복이었다. 천 길 낭떠러지에서 그는 세상 속으로 걸어 나올 기회를 잡았다. 기회를 또 흘려보낼 수도 있었지만, 용기를 냈다. 그동안 안으로 삼키기만 했던 얘기를 다카츠키에게, 미사키에게 털어놓으며 상처와 죄의식, 진실을 똑바로 마주했다.


“나는 상처 받아야 할 때 상처받지 않았다.”(기노,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

“나는 제대로 상처받아야 했어. 진실을 지나치고 말았어. 실은 깊은 상처를 받았지. 곧 미쳐 버릴 정도로. 하지만 그러기 때문에 계속 못 본 척했어.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일 수 없었어. 그래서 난 오토를 잃은 거야, 영원히. 그걸 지금 알았어. 오토가 보고 싶어”(가후쿠)


상처를 입었을 때 제대로 아파하지 않으면 그 상처는 계속 새 살을 만들고 언제든 수면 위로 올라온다. 진실을 모르는 두려움 역시 마찬가지다. 상처도 진실도 피하지 말고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너무 아파서 절대 못 할 것 같지만, 한국 영화 ‘빛나는 순간’의 대사처럼 ‘살다 보면 살아진다’. 고전 희곡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대사도 같은 말이다.


수화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나 역의 배우 박유림 ⓒ 수화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나 역의 배우 박유림 ⓒ

“하지만 어쩌겠어요, 살아야죠. 삼촌,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을 끝까지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 주는 시련을 꾹 참아 나가는 거예요.”(소냐. ‘바냐 아저씨’)


과거엔 이 대사가 무조건 참기만을 강요하는 수동적 제언처럼 들렸다. 이 또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로 들어오니 다르다. 영화는 말한다.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에게로, 아니 나의 진실로 나아가는 손잡이는 내 쪽으로 달려 있다고. 그러니 내 손으로 문을 닫고 마음의 안쪽으로, 안쪽으로 달리기보다 손잡이를 열어 밖으로 나오라고. 그것이 우리를 불안과 공허, 고독과 슬픔으로부터 구하는 길이라고.


그렇게 밖으로 나와 내 인생이라는 나의 차를 직접 운전하라고 말한다. 가후쿠의 소중한 빨간 차를 어느덧 ‘마이 카’로 삼은 미사키의 운전, 한국이라는 낯선 곳에서의 운전임에도 내 집처럼 편안해 보였던 것처럼 스스로 운전대를 잡는 게 고통에서 벗어나 미소 지을 수 있는 삶의 출발점이라고 어깨를 도닥인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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