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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명대사⑮] Dr. 주영도가 남긴 마지막 부탁(너는 나의 봄)


입력 2021.09.01 08:47 수정 2021.09.04 11:22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정신의학과 전문의 주영도 역할의 배우 김동욱 ⓒ이하 드라마 '너는 나의 봄' 홈페이지 정신의학과 전문의 주영도 역할의 배우 김동욱 ⓒ이하 드라마 '너는 나의 봄' 홈페이지

“문제는 믿음보다 설렘이 먼저 와버린다는 거다. 그리고 문제는, 그 대책 없는 설렘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게 됐다는 거고. 누군가를 마음에 들인다는 건 그 마음에 상처받기 좋은 구석이 생긴다는 것. 그걸 다 알면서도 그 손을 놓지 않겠다는 것. 상처받고 싶지 않다. 아픈 시절을 소환하는 바보짓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행복하고 싶다.”


지난 25일 종영했지만, 티빙과 넷플릭스에서 여전히 볼 수 있는 tvN 드라마 ‘너는 나의 봄’(연출 정지현, 극본 이미나) 2회에 나온 강다정(서현진 분)의 내레이션이다. 맞다, 2회에 이런 대사가 나와 버리는데 어떻게 끝까지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개인적으로, ‘우리는 왜 사랑할까요? 계속 상처받으면서도, 실패하면서도 왜 또 사랑에 빠지는 걸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 대사를 통해 들었다. 잘 따져보고, 충분히 돌다리 두드려 보고 비로소 믿을 수 있는 사람일 때 사랑하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믿음보다 설렘이 먼저 와버린단다. 맞다, 사랑은 그렇게 언제 온 줄도 모르게 온다. 설렘이 먼저 도착했어도 믿음이 따르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니 얼마 못 가 연애에 마침표가 찍힌다.


그렇게 대책 없는 설렘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게 돼 놓고도 누군가를 마음에 들인다는 것은, 사랑하는 이가 생겼다는 것은 마음에 ‘상처받기 좋은 구석’이 생기는 것이란다. 아, 그래서 그렇게 사랑이 아프고 힘들었구나…. 동시에, 그걸 다 알면서도 오늘 당신이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고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랑이다! 드라마 ‘너는 나의 봄’은 선명하게 우리가 상처를 거듭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유를 말해 준다, ‘행복해지고 싶다’.


영도와 다정 커플을 연기한 배우 김동욱과 서현진(왼쪽부터) ⓒ 영도와 다정 커플을 연기한 배우 김동욱과 서현진(왼쪽부터) ⓒ

정말 그렇다. 사랑만큼 행복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만,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듯, 사랑이 클수록 상처도 깊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동시에 가장 슬플 수 있는 일이 사랑이다. 2회에는 또 이런 대사도 나온다. 정신과 의사이자 탁월한 프로파일링 재능으로 경찰을 돕는 주영도(김동욱 분)의 말이다.


“물에 빠졌을 때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내가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 발밑이 얼마나 깊을지를 모른다는 것. 한 번쯤 깊이 빠져 본 사람은, 그래서 두려움이 더 커진다. 그것이 강이라도 바다라도 사랑이라도.”


깜짝 놀랐다. 물에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어서 스트레스가 심한 날이나 많이 피곤한 날 물에 빠지는 꿈을 꾸는데, 두려움의 지점을 드라마가 정확히 짚어 냈다. 나는 분명 발목 정도의 시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깊은 물이 돼버리고, 야트막한 노천탕에 들어갔는데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영장이 돼버리고 만다. 그때 가장 무서운 내가 빠진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과 심정이다.


그런데 그 말끝에 더욱 놀라운 인간사의 진리를 알려준다, ‘사랑이라도’. 강이나 바다뿐 아니라 사랑도 그 깊이를 알 수 없어서 두려운 거였다. 유레카, 반백 년을 살고도 몰랐던 것을 새로이 깨닫는 순간이다. 나와 그가 얼마나 깊이 사랑하게 될지, 나와 그가 서로의 밑바닥 어디까지 가게 될지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엔 알 수 없다. 심해에 빠지는 것보다 무서운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다, 그것도 기꺼이. 아마도, 이런 순간을 맞이하려고 그러는 것 아닐까. 14회에 나오는 대목이다.



달달한 사랑 ⓒ 달달한 사랑 ⓒ

영도: 문 열어 주려고.

다정: 문은 왜 갑자기.

영도: 잘해 주고 싶어서. 손은 좀 (여기에).

다정: 왜요?

영도: 손을 이렇게 잡아야 걸으니까. 가방 들어 줄까요?

다정: 안 무거워요.

영도: 무거우면 말해요.

다정: 이렇게 잘해 주고 싶었으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드라마 ‘너는 나의 봄’이 보여주는 사랑은 뜨겁지도 비참하지도 않다. ‘달달’하다. 그래서 참 좋다. 이렇게 잘해 주고 싶은 걸 못 하고 참느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니! 맞다, 사랑은 자꾸만 잘해 주고 싶고, 해 준 것보다 못 해 준 걸 기억하고, 얼른 해 주고 싶어서 안달 나는 마음이다. 그래서 사랑은 주는 거라는 말이 있나 보다.


키 작은 들꽃, 작은 울타리의 '동그란 위로' ⓒ화면 갈무리 키 작은 들꽃, 작은 울타리의 '동그란 위로' ⓒ화면 갈무리

사랑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궁금해지는 게 있다. 우리 사랑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14회에서 다정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한다.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어? 어쩌다가 그렇게 좋아진 거야?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도 될까?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발아래 떨고 있던 들꽃 하나가 울타리를 만나고 작고 동그란 위로를 만났을 때부터,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다정)


사람들의 발아래, 사람에게 상처받은 아픈 가슴 안고 살아오던 한 포기 들꽃이었던 다정. 영도라는 울타리를 만나 ‘작고 동그란 위로’를 받았다. 친구 여럿이 손잡고 만들어 주는 울타리도 좋지만, 연인의 한 아름이 만드는 작고 동그란 위로만큼 좋은 게 또 어디 있으랴.


마음의 위로로 시작된 사랑은 작고 동그란 포옹으로 이어질 것이다. 포옹도 하기 전, 사랑의 증표를 확인하기 훨씬 더 오래전, 마음의 위로를 건네고 받았던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됐다는 말은 마치 운명처럼 들린다. 이미나 작가는 어떻게 이런 표현을, 아니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일까, 감탄이 절로 인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 ⓒ 소소한 일상의 행복 ⓒ

‘너는 나의 봄’은 멜로 드라마인 동시에 힐링 드라마다. 상처받은 이,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어렸을 때 목에 아픔의 칼이 박히고도 아직 못 뺀’ 어른들에게 치유와 위안을 전하는 작품이다. 특히 드라마 막바지 16회에 이르면, 이제 헤어져야 하는 우리가 걱정된다는 듯, 당부의 말을 거듭 되뇐다.


두 가지를 경계하는데, 하나는 자꾸 우리가 채준이나 이안 체이스(윤박 1인 2역)처럼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 마음을 뺏길까 걱정한다.


“네가 어둠을 오래 들여다보면 어둠도 너를 들여다본다.” (고진복, 이해영 분)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관한 소중함을 잊고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으로 여길까 염려한다.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침이면 눈을 뜨고 밤에는 잠이 드는 것이 어느 사이 선선해진 바람이, 푸른 하늘이, 모르는 순간에도 뛰고 있는 내 심장과 바쁘게 걷는 두 다리가, 그 모든 것이 당연할 때가 있었다. 버거운 인연에 힘겨워했던 시절조차도, 스치는 인연에 아쉬워하던 순간도, 그 모든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를 때가 있었다.” (영도)


아픈 계절의 끝에 손 내밀어 준 당신은 나의 봄 ⓒ 아픈 계절의 끝에 손 내밀어 준 당신은 나의 봄 ⓒ

드라마 ‘너는 나의 봄’은 우리가 어둠에 몰두하지 않는 방법,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안한다. 하나는 드라마 내내 보여준 사랑이다. 어떤 사랑인가 하니, 영도와 다정처럼 좋은 사람 두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애쓰는 삶 속에서 만나 서로에게 도움이 되려고 정성을 다하는 사랑이다.


“최선을 다해, 최대한 오래 살아 보겠다고 많이도 아팠던 계절의 끝에서 내게 손을 내밀어 준 당신의 나의 봄이다.” (영도)

“어쩌면 다시 아픈 계절이 온다 해도 의심 없이 끈질기게 또다시 손을 내밀어 줄 나는 당신의 봄이다.” (다정)


다른 한 가지는 관심이다. 달려드는 관심이 아니라 지켜봐 주는 관심.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 해도 이 세상을 함께 살아나가는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태도를 넌지시 말한다.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온 영도가 좀 더 많은 사람과 마음을 나누고자 출연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면서 남기는 당부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체리 향기’라는 영화 얘기를 했는데요. 한 남자가 죽고 싶은 마음으로 운전을 하고 가다가 한 할아버지를 태워요. 근데 그 할아버지가 자기 얘기를 해 줘요. 자기도 예전에 죽을 마음으로 나무에 올라갔었다고. 근데 거기에 체리가 달려 있었고, 무심코 그 체리를 먹었는데 그게 달고 맛있었다고. 햇살도 환하고 아이들도 너무 예쁘고 그래서 (남자도) 그냥 살기로 했대요. 아마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겠죠.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가, 대화가 사람을 살린 거죠. 사실, ‘세상은 아름답다’ ‘살아야 한다’ 뻔한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또 사람을 살리는 건 결국 그런 거예요. 내가 네 이야기를 들어 줄게. 내가 네 앞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 줄게. 네가 혼자 있게 두지 않을게. 내가 널 지켜보고 있을게. 세상이 너무 깜깜해서 다 놓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깜빡거리는 불빛 하나만 보여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도, 손끝만 살짝 닿아도 그걸로 충분하거든요.”


"내가 널 지켜보고 있을게" ⓒ "내가 널 지켜보고 있을게" ⓒ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그의 영화 ‘체리 향기’가 이렇게 불쑥 튀어나올 줄 몰랐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차를 몰며 계속 동승자를 찾는다. 자신이 수면제를 먹고 누우면 그 위에 흙을 덮어 줄 이를 찾는 것이다. 거금을 준다 해도 나서는 이 없는 가운데 노인 한 명이 자청하고 나선다. 그다음 얘기는 주영도 박사가 들려준 대로다.


그렇다, 대화의 내용이 아니라 대화 그 자체가 남자를 살렸다. 이 심심한 듯하면서도 우리의 인생을 꿰뚫는 영화는 그해 칸국제영화제, 반백 년의 나이를 먹은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영화만큼이나 영화 같은 얘기가 또 있는데, ‘체리 향기’(국내 개봉 제목, 당시엔 ‘앵두 맛’이라는 타이틀)는 제작국인 이란 정부의 출국 금지 조치로 칸에 출품조차 하지 못했다. 폐막 3일 전에야 어렵사리 칸 현지에 상영 공고가 붙었다. 사전만큼이나 두꺼운 출품작 소개 책자에도 없고, 출품된 바 없기에 경쟁 부문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던 영화가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이 됐다.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 이안 감독의 ‘얼음 폭풍’, 아톰 에고이안 감독의 ‘스위트 히어 애프터’를 제치고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와 공동으로 수상의 기쁨을 안았다.


드라마 제목 ‘너는 나의 봄’의 의미가 드러나는 대사, “당신은 나의 봄” “나는 당신의 봄”이 아니라 영도의 대사를 가장 마지막에 적은 이유가 있다. 사랑은 기적, 쉽게 일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내가 널 지켜보고 있을게”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 모든 이에게 그럴 수 있는 선인이기도 어렵다. 자꾸만 마음이 가는 이에게라도, 그렇게 한 사람이 한 사람만 지켜봐 줘도 삶은 달라질 수 있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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