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스’ 이후 ‘스파이시’, ‘리치 맨’ 이후 ‘레모네이드’…무거운 세계관 덜어내고 밝은 에너지로 진입장벽 낮춰
에스파(aespa)가 정규 2집 ‘레모네이드’(LEMONADE)로 순항하고 있다. 발매 직후 국내외 음반 차트와 글로벌 플랫폼에서 빠르게 성과를 내고, 음원 차트에서도 상위권에 오르며 다시 한 번 존재감을 증명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에스파가 중요한 국면마다 선택해온 방식이다. 이들은 팀의 정체성인 ‘쇠맛’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 무게를 덜어낸 밝고 직관적인 곡으로 대중의 반응을 끌어내왔다.
에스파 ‘레모네이드’ 컴백 기자간담회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2일 음원 플랫폼 멜론에 따르면 에스파의 정규 2집 타이틀곡 ‘레모네이드’는 오후 1시 기준 톱100 차트에서 9위를 기록 중이다. 애플뮤직 대한민국 톱100 차트에서도 2위에 이름을 올렸다. 스포티파이 글로벌 차트에는 218만 9171회 스트리밍으로 50위에 진입하며 에스파 자체 최고 진입 성적을 냈다.
앨범 성과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9일 발매된 정규 2집은 아이튠즈 톱 앨범 차트에서 총 19개 지역 1위를 기록했고, 일본 오리콘 데일리 앨범 차트 1위(5월 30일 기준)에 올랐다. 중국 QQ뮤직에서는 급상승 차트와 인기곡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판매액 500만 위안 달성 시 부여되는 ‘다이아몬드 앨범 인증’을 획득했다. 큐큐(QQ)뮤직 전체 및 정규 디지털 앨범 판매 차트, 쿠고우 뮤직 디지털 앨범 판매 차트, 일본 라인뮤직 앨범 TOP100 실시간 차트 등에서도 1위에 오르며 글로벌 반응을 입증했다.
에스파는 데뷔 이후 꾸준히 성과를 내온 팀이다. 다만 2024년 ‘슈퍼노바’(Supernova)가 만든 폭발력은 그 안에서도 예외적이었다. ‘슈퍼노바’는 발매 6일 만에 멜론 톱100 1위에 올랐고, 이후 일간차트 1위를 99회 기록했다. 2024년 써클 디지털 차트 연간 1위, 멜론 6·7·8월 월간차트 1위, 멜론 연간 차트 3위 등 주요 지표를 휩쓸었고, 다수의 연말 시상식에서도 ‘올해의 노래’에 등극하며 에스파의 전성기를 각인시켰다.
물론 이후 발매한 싱글 1집 ‘더티 워크’(Dirty Work)는 멜론 톱100 2위, 초동 약 96만장을 기록했고, 9월 발매한 미니 6집 ‘리치 맨’(Rich Man) 역시 초동 100만장을 넘기며 빌보드 글로벌 차트에서도 준수한 성과를 냈다. 수치만 놓고 보면 여전히 최상위권이었다. 다만 ‘슈퍼노바’가 만든 신드롬과 비교하면, 대중적 체감도와 화제성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레모네이드’의 초반 반응은 단순한 컴백 성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지난해 활동이 실패였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에스파 기준에서 한풀 잦아졌던 대중적 온도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는 곡이 등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에스파는 이번에도 무거운 세계관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대신, 자신들의 강한 색을 밝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다. 타이틀곡 ‘레모네이드’는 강렬하고 트렌디한 신스 베이스 사운드가 중독적인 일렉트로닉 댄스곡이다. 에스파 세계관의 새로운 시즌을 암시하는 동시에,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쳐오든 이를 기회로 만들겠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레모네이드’는 에스파의 ‘쇠맛’을 지우지 않는다. 강한 신스 베이스와 전자음악 질감은 에스파 특유의 차갑고 선명한 색을 유지한다. 다만 그 템포를 무겁게만 끌고 가지 않는다. 곡의 메시지는 명료하고, 톤은 이전보다 한층 키치하고 유쾌하다. 팬들이 붙인 ‘쇠콤달콤’이라는 표현처럼, 차갑고 강한 에스파의 정체성에 상큼하고 밝은 에너지를 더한 곡이다.
에스파의 행보를 돌아보면 이 ‘쇠콤달콤’ 공식은 처음이 아니다. 에스파는 ‘블랙맘바’(Black Mamba), ‘넥스트 레벨’(Next Level), ‘새비지’(Savage), ‘드라마’(Drama), ‘아마겟돈’(Armageddon) 등 강하고 묵직한 세계관 사운드로 팀 정체성을 만들어왔다. 이 곡들은 에스파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은 핵심이다. 에스파라는 팀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쇠맛’도 여기서 비롯됐다.
에스파 ‘마이 월드’ 컴백 기자간담회 ⓒ데일리안 김민호 기자
다만 에스파가 중요한 국면마다 대중적 흐름을 넓힌 건 이 ‘쇠맛’을 마냥 무겁게 밀어붙이기보다, 밝고 직관적인 에너지로 풀어낸 노래였다. ‘걸스’(Girls) 이후 ‘스파이시’(Spicy)가 대표적이다. ‘걸스’는 발매 첫 주 142만장 이상 판매되며 당시 케이팝(K-POP) 걸그룹 최초 초동 밀리언셀러 기록을 세웠고, 빌보드 톱 앨범 세일즈 차트에서도 1위에 올랐다. 음반 성과는 압도적이었지만, 국내 대중 반응의 체감도는 ‘넥스트 레벨’과 ‘새비지’가 만든 상승세에 비해 다소 엇갈렸다.
여기에 코첼라 무대 라이브 논란, 2023년 초 회사 경영권 분쟁과 ‘나무심기’ 세계관 논란까지 겹치며 에스파의 다음 방향성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스파이시’는 무거운 세계관 설명을 덜어내고 밝고 경쾌한 에너지로 진입 장벽을 낮췄다. 에스파 특유의 당당함은 유지하면서도, 더 직관적인 멜로디와 청량한 무드로 대중적 반응을 넓힌 것이다.
‘슈퍼노바’ 역시 같은 흐름에서 볼 수 있다. 곡 자체는 에스파 특유의 차갑고 기계적인 사운드를 유지했지만, 중독적인 탑라인과 반복 훅, 퍼포먼스 포인트가 강하게 작동했다. 어렵고 무거운 세계관 설명보다 귀에 먼저 꽂히는 사운드와 직관적인 에너지로 대중을 끌어들였다. 그 결과 ‘슈퍼노바’는 에스파를 2024년 가요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레모네이드’도 이 연장선에 있다. 에스파의 세계관은 여전히 살아 있다. 현실과 가상 세계를 오가며 생긴 균열, 이를 기회로 만들겠다는 메시지는 에스파다운 서사다. 하지만 곡은 이를 복잡한 설정 설명으로 풀지 않는다. 시련을 레몬에 빗대고, 그것을 레모네이드로 바꾼다는 익숙한 속담을 통해 메시지를 쉽게 전달한다. 강한 세계관을 쉬운 문장과 밝은 에너지로 번역했다.
에스파에게 필요한 것은 ‘쇠맛’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그 온도와 무게를 조절하는 일이다. 강한 베이스와 전자음악 기반 사운드, 세계관, 비현실적인 비주얼 콘셉트는 에스파를 다른 걸그룹과 구분 짓는 핵심 요소다. 다만 그 색이 지나치게 무거워지면 대중적 접근성이 낮아지고, 반대로 너무 덜어내면 에스파만의 개성이 흐려진다.
‘스파이시’, ‘슈퍼노바’ 그리고 이번 ‘레모네이드’가 효과적으로 작동한 이유는 이 균형을 잡았기 때문이다. 세 곡 모두 에스파 특유의 차갑고 선명한 질감을 유지하면서도, 밝은 탑라인과 직관적인 훅, 키치한 에너지로 진입 장벽을 낮췄다. ‘레모네이드’의 초반 성과는 에스파가 가장 에스파다우면서도 대중에게 넓게 닿는 방식이 무엇인지 다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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