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화의 균형적 발전 문제가 거듭 거론되면서 업계에서는 중앙의 문화 자원을 단순히 지역으로 옮기는 물리적 이전을 넘어 지역 문화 자체의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드웨어 중심의 접근에서 벗어나, 지역이 스스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소프트웨어 강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 공연 장면 ⓒ서울예술단
이 같은 논의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내년도 추진 예정이던 서울예술단의 광주 이전 계획을 재논의하기로 하면서다. 문체부는 지난 13일 “지난 정부에서 나름 타당한 사유로 서울예술단의 국립광주아시아문화전당(ACC)으로의 이전을 발표했으나, 충분한 의견 수렴 없이 발표한 점이 있어 예술계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확정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지난 14일, 국회 문체위 국정감사에서도 이와 관련한 발언이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민형배 의원은 “대구에 국립오페라단, 광주에 서울예술단을 이전한다고 했는데 왜 재검토 하냐”고 물었고,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지역문화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서울예술단을 광주로 이전하는 것은 (별개로 봐야 한다)”고 답했다. 최 장관이 예술단 이전과 관련해 직접적으로 입장을 표명한 건 처음이다.
수도권에만 집중된 문화 인프라 분산과 자원의 불균형 해소는 문화계의 과제였다. 지난 정부에서 문체부가 중장기 문화비전 ‘문화한국 2035’를 공개하며 핵심 전략으로 ‘지역 문화균형 발전’을 첫머리에 세우고 1번 추진과제로 국립예술단체 전체의 지역 이전을 제시한 것 역시 이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그 시작이 내년 서울예술단과 국립오페라단을 광주와 대구로 각각 이전한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민형배 의원실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문체부 산하 8개 국립예술단체의 공연 실적(공연 횟수)에서 수도권은 최근 5년간 88.1%을 차지했다. 특히 올해 1~8월은 89.2%로 더 올라갔다. 전체 공연 시장으로 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KOPIS에 따르면, 지난해 ‘공연시장 티켓판매 현황 분석 보고서’의 지역별 현황에 따르면 전체 공연건수(2만1634건) 중 서울의 공연 건수는 9966건으로 전체의 46.1%로 절반에 가까운 수치였고, 서울을 비롯한 경기, 인천 등 수도권이 차지하는 공연건수 비중은 62.7%로 대다수 공연이 수도권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분석됐다.
때문에 일각에선 “문화를 누림에 있어서 지역이 소외되지 않도록 국립예술단체가 앞장서야 한다”며 국립예술단체의 지역 이전을 환영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업계 전문가들은 단순히 단체를 이전하는 것만으로는 실질적인 지역 문화 발전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우려를 꾸준히 제기했다. 전문가들은 지역의 ‘문화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앙의 완성된 콘텐츠를 지역에 내려보내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 스스로가 경쟁력 있는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콘텐츠 생산’ 중심의 정책이 주목받는다. 앞서 ‘어쩌면 해피엔딩’을 쓴 박천휴 작가가 제안한 ‘지역 트라이아웃 공연’ 활성화가 대표적인 예다. 이는 신작 공연이 서울의 대형 무대에 오르기 전, 지역에서 먼저 시범 공연을 가지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지역 관객은 새로운 작품을 가장 먼저 만나는 기회를 얻고, 지역 공연장은 제작 과정에 참여하며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다.
국립예술단체와 지역 단체의 협력 모델 구축도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공동 제작, 기술 및 인력 지원, 레퍼토리 교류 등 다양한 방식의 협력을 통해 국립예술단체가 가진 역량을 지역으로 이전하고, 지역 예술가 및 기획자들에게는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립단체가 가진 풍부한 자원과 노하우가 지역의 창의성과 만날 때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 예술단체 관계자는 “지역 문화의 자율성과 권한을 강화해 지역이 주도하는 문화 생태계를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앙 중심의 획일적인 방식은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지역의 특성과 요구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지역 자신이기 때문”이라며 “지역이 진정한 주체가 돼 주도적으로 문화 정책을 수립하고 예산을 집행할 수 있도록 권한을 이양하고, 관련 전문가 양성 및 인프라 구축을 위한 ‘조력자’로서의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