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이재명과 정부 '본질적 변화' 보이면 김정은 대남정책 변화"
李대통령 "안미경중, 과거처럼 취할 수 없는 상황"
이재명의 페이스메이커 론은 현실성 가질 수 없는 '희망 사항'
北 "비핵화망상증 위선자 정체가 드러났다"
‘쇼 달인’ 트럼프·이재명 두 대통령의 첫 합이 끝났다. 메이저리그의 트럼프 선수와 달리 2부에 속한 이재명 선수도 갈고닦은 연기를 나름 선보였다.
영빈관 제공도 만찬 대접도 없었음에도 트럼프가 “이번 합의는 한국이 체결한 것 가운데 가장 큰 규모(the biggest deal)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무역협정”이라 자화자찬할 정도로 미국 요구에 응했으나, 정상회담 합의문도 공동성명도 도출하지 못했다.
지난 7월 30일(현지시각) 타결된 관세협상의 후속 협상에서도 이견을 보여 “법적 구속력 없는 양해각서(MOU)를 맺기로 합의했다”며 향후 진통을 예고했다.
관세율이 고정이냐 변동이냐가 아니라, 원금(미국의 투자 요구액)이 얼마가 될지도 모를 상황이다. 여기에는 경제 및 안보 변수에 더해 이재명과 정부의 국내 정치적 그리고 이념적 리스크도 작용하고 있다.
8월 25일(현지시각) 열린 한·미 정상회담과 이어진 이 대통령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연설(영어원문은 CSIS 홈페이지에서 인용)을 중심으로 이번 무대를 짚어본다. CSIS 연설은 국내에서 ‘정책연설’로 소개된 바와 같이, 정상회담 합의문·공동성명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 조야에, 북한에, 중국에, 전 세계에 이재명과 정부가 제시하는 정책 노선으로 의미가 적지 않다.
먼저 필자의 눈에 확 들어온 것은 이재명이 CSIS 연설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한 번 말했고, 이를 ‘freedom and democracy’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이재명은 “The new government was elected by the people who cherish freedom and democracy. And we are ready to further strengthen the alliance we have with the ROK – between the ROK and the U.S.(직역하면 “새 정부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소중히 여기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과의 동맹, 즉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대목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언급했다.
독자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필자는 우리 헌법상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근거로 한 대한민국이 지향하는/지향해야 할 이념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가 ‘liberal democracy’가 아니라 ‘자유(freedom)’와 ‘민주주의(democracy)’임을 주장한다.
이재명 자신과 정부와 민주당이 정말로 자유민주주의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유와 민주주의로 이해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전 세계가 주시한 무대에서 민주당 강령에도 없는 ‘자유’를 재차 언급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지난 7월 13일 세계정치학회(IPSA) 서울 총회 연설에서 이재명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한 번 말한 바 있다.
다만 이번의 경우에는 자신과 정부와 민주당의 이념적 지향에 대한 미국의, 그리고 우리 국민의 의구심을 불식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자유와 민주주의 언급 바로 뒤에 한·미동맹 강화가 이어지고 있고, 위 대목을 국내 언론에 배포한 국문본에는 “새로운 정부는 한·미동맹의 기본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탄생했고, 그만큼 동맹을 더욱 돈독하게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로 원문과 다르게 추가·각색했기 때문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소중히 여기는 국민”을 “한·미동맹의 기본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로 둔갑시켜, 이재명과 정부가 한·미동맹을 중시할 뿐만 아니라 한·미의 중심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두 번째로 유념하게 만든 것은 이재명이 한·미 양국의 연대를 ‘70년’으로 두 번(“over 70 years”, “over the past 70 years”) 말하면서 강조한 것이다.
이번 미국 방문에서 이 대통령이 한·미동맹의 중요성에 목소리를 높였다는 점에서 1953년 10월 1일 한·미동맹 체결을 시점으로 계산해 70여 년의 한·미 연대를 말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며칠 전 8월 15일이 광복과 분단 80주년이었다. 조선 패망 시기 미국의 대외정책과 역할은 일단 제외하고, 1945년부터 한반도, 특히 대한민국이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난 80년의 한·미 연대를 말하지 않고, 굳이 70년이라 두 번이나 말한 것은, 이재명과 민주당이 1945년 해방으로부터 6.25 전쟁 발발에 이르는 기간의 미국의 위상과 역할에 관해 가진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더구나 민주당이 최근 다시 대한민국 건국 시기와 관련해 ‘역사 전쟁’을 벌이는 시점에서, 38도선 분단과 미국의 역할, 미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이승만 정부의 등장과 건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내재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세 번째 눈길을 끌었던 것이 백악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의 모두발언 “(트럼프) 대통령님께서 피스메이커(peacemaker) 하면 저는 페이스메이커(pacemaker)로 열심히 지원하겠다”였다. 한반도 평화 및 북핵 문제 관련 언급이었다고 본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재명의 최대 화두는 어떻게 북·미 대화의 중재자로서 역할을 가질 수 있을까, 북·미 대화의 성사를 위해 얼마나 자신이 노력하고 있는가를 김정은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였다.
‘페이스메이커’는 능력도 없고 그럴 수 있는 현실도 아니었던 상황에서 문재인이 내세웠다가 결국은 소리 소문 없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한반도 운전자론’에 대비된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주인공이 되게 하고, 이재명 자신은 분위기 조성에 주력하면서 목표 달성에 일조하겠다는, 절제하면서도 ‘현실성을 반영’한 의지라 할 수도 있다.
페이스메이커는 주전 선수가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주자들을 주전 선수와 합의한 속도로 이끄는 보조적 선수로서, 그 전제는 주전 선수와의 긴밀한 합의다. 주전이 동의하지 않으면, 페이스메이커 존재 자체가 필요치 않다.
당장 북한은 8월 27일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비핵화망상증》에 걸린 위선자의 정체가 드러났다”를 통해 이재명의 CSIS 연설, 특히 ‘비핵화’에 대한 언급에 대해 “한국을 왜 적이라고 하며 왜 더러운 족속들이라고 하는가를 보여주는 중대한 계기,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로 되었다. 원래 한국은 우리에 대한 대결 정책을 국책으로 정한 철저한 적대국이다”라 비난하고 나섰다.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대화를 고대하는 상황에서, 김정은이 이재명을 아예 무시하고 트럼프와 ‘조건부 직거래’(비핵화 배제)하려는 마당에, 트럼프·김정은이 사이에 이재명을 끼워줄, 어떤 역할을 부여할 마음이 과연 있을까.
이재명의 페이스메이커 론은 현실성을 가질 수 없는 ‘희망 사항(wishful thinking)’일 뿐이다. 지난 칼럼(“김정은의 이재명 빚 독촉, 도발 가능성,” 2025.08.22)에서 지적했듯이 김정은은 이 발언도 이재명의 ‘대내외 정치용 쇼’로 받아들일 것이다.
물론 북한이 “(이재명 정권이) 우리와의 관계를 사상 최악으로 몰아간 것으로 하여 국내는 물론 세계 여론의 뭇매를 맞은 윤석열 정부와의 차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한 바와 같이, 이재명과 정부가 ‘본질적 변화’(2국가 주장 호응, 통일 폐기)를 보일 경우 김정은의 대 이재명, 대남 정책에 변화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이 CSIS 연설에서 “북한의 지속되는 핵·미사일 개발과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국내 언론에는 ‘러시아와의 밀착’으로 배포)”, “한반도에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시대의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바로 북한의 핵 문제입니다. 한반도와 전 세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해 한반도 비핵화 목표를 견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와 같이 북한의 대북 국제제재 위반과 비핵화를 언급한 것은 적절했다.
북한이 이 대목에서 극렬히 비난하고 있으나, 이재명이 “한·미 양국은 북한의 도발에는 강력히 대응하는 동시에, 북한과의 대화를 위한 노력도 병행해 나갈 것입니다”라고 밝힌 바와 같이, 그의 남북 대화 의지와 함께 견지되어야 할 노선이다.
다만 북핵 문제와 관련해 이 대통령이 8월 19일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3단계 비핵화(1단계는 핵과 미사일에 대한 동결, 2단계는 축소, 3단계는 비핵화) 해법’을 제시했으나, 여기에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북한 핵 무력 진전에 제한을 가하기 위한 핵 동결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북핵의 동결-축소-비핵화 전(全) 과정’에 대한 국제적 합의, 김정은의 동의가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북핵 동결은 핵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결을 대가로 김정은이 얻게 될 대북 제재 완화는 북핵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할, 핵 무력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줄 물질과 시간을 김정은 손에 쥐어줄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대통령이 “한국은 한반도의 안보를 지키는 데 있어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앞으로 해나갈 것입니다”,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한·미·일 협력을 긴밀히 다져나갈 것입니다”란 대목도 시점상, 내용상 적절했다.
자주적 주권 국가로서 우리는 우리의 안보를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하고, 그것을 위한 노력과 준비를 부단하게 추진해야 한다. 엄중한 한반도 안보 현실에서 우리가 미국에 군사적·물리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나, 자주국방을 정신적·심리적으로부터 출발해 실질적으로 개척해야만 하고, 현 상황이 중요한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한·일 정상회담에서 강조한 한·미·일 간 협력을 한·미 정상회담에서 다시 강조한 것은 우리 ‘포괄적 안보(comprehensive security)’를 위해서 미국과 일본의 기대에 선도적으로 부응하려는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한·미 그리고 한·일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이재명 대통령의 연기는 무난했다. 남은 것은 그가 육성으로 밝힌 대사(臺詞)들에 대한 신뢰성이다.
3·4류의 국내 정치에서나 통한 “그렇게 말했다고 진짜 그럴 줄 알았나”가 국제무대에서 통할 리가 없다.
CSIS 연설 후 한국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경제적 실익은 다른 곳에서 취한다는 의문이 있다는 질문에 대해, 이 대통령이 중국과의 경제 협력과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병행하는 이른바 ‘안미경중(安美經中)’ 노선과 관련해 “한국이 과거처럼 이 같은 태도를 취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됐다”고 답했다.
당장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10월 말~11월 초)에 시진핑 주석을 초청하는 등 대중 외교를 펼쳐야 할 이재명과 정부가 어떤 목소리를 낼지 주목된다.
연설에서 이재명은 ‘비상계엄(martial law)’, ‘친위 쿠데타(self-coup)’, ‘극우(far right)’, ‘서슬 퍼런 독재정권(brutal dictatorship)’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 ‘민주주의’를 “가장 최종적인 종합 예술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범”이라 말하면서도, 북한 김정은 독재체제에 대해서는 지난 세계정치학회 총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입을 닫았다.
글/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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