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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명대사⑦] ‘토탈 이클립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그 말


입력 2021.05.13 00:00 수정 2021.05.13 09:03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이하 영화 '토탈 이클립스' 스틸컷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이하 영화 '토탈 이클립스' 스틸컷

배우도 나이를 먹는다. 1974년생,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그네들 나이로 46세다. 하지만 이름을 들었을 때 딱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가 20대 초반 찍은 영화 ‘토탈 이클립스’(1995)나 ‘로미오와 줄리엣’(1996), ‘타이타닉’(1997)에 가깝다. 미간에 깊은 내(川)가 흐르고 세상의 때가 묻어도,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청춘이다.


오히려 헷갈리는 건 그의 이름이다. 아버지가 이탈리아계라는 걸 반영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고 오래 불렸고, 2021년 포털들도 그리 적는 경우가 많지만, 표준 표기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다. 1998년 정부·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가 제22차 외래어 심의위원회를 열고 ‘Leonardo DiCaprio’의 외래어 표기를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로 정했다. 그가 태어나고 활동하고 있는 곳이 미국이고, 그 현지에서 불리는 발음에 따른 결정이었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연기력, 배우로서의 매력에 토를 다는 이는 없을 것이다. 명배우의 과거 작, 푸릇푸릇한 시절을 다시 보는 기쁨은 크다. 그것이 일찌감치 연기 천재 소리를 들었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라면 더욱 그렇다. 그 가운데 ‘토탈 이클립스’(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를 가장 좋아한다. 아티스트가 아티스트를, 천재가 천재 연기를 하는 것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나이 들수록 달라지는 느낌도 있다. 처음엔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시인 랭보를 연기하는 디캐프리오의 날 것 같은 연기가 짜릿했고, 그다음엔 희곡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보다 살리에리의 감정에 이입이 쉽듯 랭보를 먹여 살리면서도 시적 영감을 얻으려 하는 베를렌느가 크게 보였다. 더 나이가 드니 랭보든 베를렌느든 가릴 것 없이 예술가의 고뇌가 보이고, 그것이 예술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고’임을 알겠다. 21세기에 베토벤의 숨은 이야기를 살려낸 예술영화 ‘카핑 베토벤’뿐만 아니라 ‘유로파 유로파’ ‘어둠속의 빛’과 같이 2차 세계대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인생역정을 조명해 내는 아그네츠가 홀란드 감독의 영화이니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토탈 이클립스, 하나의 천체가 다른 천체에 의해 완전히 가려지는 현상 ⓒ 토탈 이클립스, 하나의 천체가 다른 천체에 의해 완전히 가려지는 현상 ⓒ

두 시인의 편지를 바탕으로 탄생한 영화 ‘토탈 이클립스’에서 아르튀르 랭보(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분)는 열여섯에 프랑스 문단이 주목할 시를 쓴 소년 천재다. 사람들이 읽어보기도 전에 무시할까 봐 스물한 살이라고 속였음에도 폴 베를렌느(데이빗 듈리스 분)는 그의 시에 감탄하고, 실제 나이를 알고는 탄복한다. 돈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재능도 크고 반항기도 큰 소년 예술가를 베를렌느가 파리로 부른다.


“가끔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회한이 가득한 죽음이나 분명히 존재하는 불행한 인간, 떠남의 고통스러운 마음과 책임에 대해 말하곤 한다. 우리가 취해 누운 헛간에서 그는 그곳을 둘러보며 흐느낀다. 가난한 족속들…, 어두운 거리에서 취객을 부축한다. 그는 매정한 어머가 자식에게 가지는 연민을 지니고 있다. 그는 교회가 가는 여자애처럼 우아한 몸짓을 한다. 그는 뭐든 아는 척을 한다, 사업이나 예술, 약학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를 따랐다. 그래야만 했다.”


영화의 시작이자, 노인이 된 베를렌느의 랭보에 대한 회상이다.


“출판에는 관심이 없어요. 관심 있는 건 글 자체뿐이에요.”

“당신의 마지막 작품은 좋지 않았어요. 쓰레기였죠.”

“사랑? 그런 건 없어요…가족이나 결혼을 지속시키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어리석음이나 이기심, 공포죠. 사랑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기심은 있죠. 개인의 이익에 근거한 집착도 있어요. 자기만족도 존재해요. 하지만 사랑은 없어요. 사랑은 재창조되어야 해요.”


파리에 온 소년 랭보는 행동에 거침이 없고 직설적이다. 영화 초반부터 이렇게 인생의 궤를 꿰뚫는 말이 즐비해도 되나, 그것도 이 어린 소년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천재들은 정말 뭘 배우기 전에 아는 걸까, 나이와 상관없이 경험을 깊이 받아들이는 감성과 숙고를 통해 다다른 나름의 결론일까. 일단 생각한다고 해도 입 밖으로 내는 건 쉽지 않다. 특히나 당신 글이 쓰레기라는 말은, 그것도 내가 신세 지고 기댈 유일한 후원자에게. 언제나, 누구에게든 입바른 소리를 삼키지 못하는 랭보에게, 특히나 베를렌느에게 가혹한 말을 던지는 랭보에게 베를렌느가 묻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쉬워요, 사실이니까.”


남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다. 자신에게 닥치는 일에도 명백하다. 베를렌느의 장인에게 쫓겨나 비를 쫄딱 맞은 랭보에게 베를렌느가 “고약한 늙은이 심보를 모르겠어”라고 말하면, 랭보가 답한다.


“그곳은 그의 집이니까요.”


명쾌하다. 버릇없어 보이거나 객기 넘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디캐프리오는 랭보를 연기한다. 베를렌느가 “나는 그를 따랐다. 그래야만 했다”고 회상할 수밖에 없게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랭보에게 있고, 디캐프리오가 설득력 있게 연기하고, 보는 이도 압도당하고 설득당한다. 스무 살의 디캐프리오가 해낸 연기다.


데이빗 듈리스의 연기도 두말 하면 입 아프다. 랭보에 대한 감정을 단순히 질투가 아니라 추앙, 존중, 사랑, 집착으로 느껴지도록 섬세히 연기했다. 매사 머뭇거리지 않는 랭보를 보며 생각한다, ‘세상을 바꿀 비밀이라도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랭보의 시를 읊는다. 남편의 시가 더 좋다는 아름다운 아내(로만느 보링거 분)에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 이건 새로운 거야”.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상심의 새벽.


태양과 바다가 맞닿은 곳 어딘가… 영원 ⓒ 태양과 바다가 맞닿은 곳 어딘가… 영원 ⓒ

베를렌느가 읊는 시는 15세에 데뷔한 랭보가 16세에 쓴 문제작 ‘취한 배’, 23연의 첫 행이다. 4행 24연, 총 100행으로 이뤄진 산문시의 한 행을 읽으며 베를렌느는 전율한다. 시인으로서 세상을 산다는 것을 선원 없는 배의 대항해에 비유, 시인의 영혼을 표현한 시다.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상심의 새벽.

달은 온통 잔혹하고 태양은 가혹하기만 하다.

쓰디쓴 사랑은 마비된 취기로 날 가득 채우네.

내 배의 용골, 조각나 버려라! 나는 바다로 가련다.


랭보는 어디에 가든 태양이 비치는 창가 아래 책상을 놓는다, 의자를 놓는다, 종이와 잉크와 펜을 놓는다. 그러면 그곳이 어디든 자신의 장소가 된다. 그리고 시를 쓴다.


“그러자 모든 게 분명해졌어요. 이 시대 최고의 시인이 되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걸 모두 이해하려면 몸으로 모든 것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요. 한 인간으로 사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었어요. 전 모든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죠. 천재가 되기로 작정했어요. 미래의 근원이 되고 싶어요.”


아그네츠가 홀란드 감독의 발견 ⓒ 아그네츠가 홀란드 감독의 발견 ⓒ

베를렌느에게 밝힌 시인 랭보의 출사표인데, 청년 배우 디캐프리오의 출사표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한 인간으로 사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역시 그렇게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다.


영화의 첫 발화인 베를렌느의 내레이션을 위에서 소개했는데, 영화의 진짜 시작은 자막이다.


“1871년 9월, 파리의 성공한 젊은 시인 베를렌느는 아르튀르 랭보가 보낸 주옥 같은 시 8편을 받게 된다. 베를렌느는 당장 답장을 써 보내길 ‘위대한 영혼 내게 오소서, 이는 운명의 부르심이니’. 다음 이야기는 이들의 편지와 시를 근거해 만든 것이다. 베를렌느가 위대한 시인이라면 랭보는 가히 혁명적 천재였다. 그가 16세에서 19세 사이에 남긴 시들은 ‘현대 시’의 면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와 각본가 크리스토퍼 햄튼이 적어 놓았듯, 랭보는 미래 ‘현대 시’의 근원이 되었다. 디캐프리오도 새로운 연기법의 시작, 미래 연기의 근원이 되었을까. 적어도 영화 ‘토탈 이클립스’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에게 근원이 된 건 분명하다. ‘배우로서’ 작품마다 지독하게 몰입하고 있고, ‘인간으로서’ 미래 지구환경을 위해 천연 소재와 재활용품만으로 신발을 만들고 원천기술과 원가를 독점하기보다 나눔으로 공개하는 사회적 책임경영 기업에 관여하고 있다. 내일을 생각하는 디캐프리오의 ‘진보적’ 행태에서 랭보가 보인다.


베를렌느와 랭보(오른쪽부터) ⓒ 베를렌느와 랭보(오른쪽부터) ⓒ

천재에게는 스승이 있다. 랭보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것을 체험하기를 원했고, 그 여행의 동반자를 베를렌느로 삼았다. 프랑스에서 벨기에로 영국으로 떠돌던 두 사람, 런던에 이르러서는 돈이 떨어져 베를렌느가 식탁에 올릴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홀로 분투하는 상황에 이르는데, 그래도 베를렌느는 헌신적이다.


“한 100년은 뒤처져 있는 것 같다”며 “진보적인 너를 다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왜 내게 편지를 썼는지 모르겠다”는 베를렌느에게 랭보가 말한다, 의외의 답에 베를렌느가 미소 짓는다.


“나는 무엇을 말할까는 알고 있었지만, 당신은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고 있었어. 당신에게 배울 게 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배웠지.”


비록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고, 서로 각자의 길을 갔지만, 랭보에게 베를렌느는 스승이었고 열렬한 지지자이고 후원자였다. 베를렌느, 랭보 모두 둘이 함께였을 때 최고의 시를 썼다. 베를렌느는 랭보의 새로운 시가 자신을 포함해 기성 작가들을 내모는 것에 괘의치 않았고, 랭보의 시가 이해되도록 시간을 기다리고 노력했다.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


추억은 아름답다 ⓒ 추억은 아름답다 ⓒ


영화는 시작과 끝이 같은 장면으로 연출돼 있는데, 랭보의 동생 이자벨이 베를렌느를 찾아와 오빠의 시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남길 시만 남기고 버릴 시들은 태우겠다고 알린다. 베를렌느는 이자벨이 떠난 후 주소가 적힌 명함을 찢는다. 덕분에 지금 우리가 랭보를 만난다. 영화는 아름다운 상상으로 끝을 맺는다. 홀로 압생트 2잔을 시키는 베를렌느, 이자벨이 떠난 자리에 랭보가 앉아있다.


“나를 사랑해? 그렇다면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봐, 바닥을 위로.”


단 한 번도 베를렌느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I′m very fond you”(너를 무척 좋아해)라고만 말했던 랭보가, 결혼반지가 없는 베를렌느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베를렌느를 아프게 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보다 다정한 적이 있었던가. 압생트 2잔 더! 추억은 아름답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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