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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올드무비㉞] ‘씨받이’는 야하지 않다…필녀-옥녀의 슬픈 역사


입력 2021.03.15 06:42 수정 2021.03.15 08:40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영화 '씨받이' 리마스터링 포스터 ⓒ네이버 영화정보 영화 '씨받이' 리마스터링 포스터 ⓒ네이버 영화정보

1980년대 국민 우민화 정책의 하나로 섹스·스포츠·스크린의 영어 앞글자를 딴 3S 정책이 횡행했다. 흔히 독재정권이 대중의 관심을 정치 외로 돌리기 위해 쓰는 방법이다. 당시 섹스와 스크린이 만난 지점에서 ‘에로영화’라 불리는 소위 ‘벗는 영화’들이 다수 만들어지고 개봉했다. 그 가운데는 선정적 포스터를 앞세우고 영화에 다소 노출 장면이 포함돼 있기는 하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문예적 영화도 있고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도 있었다.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 역시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작품 속에는 있지도 않은 주연배우 강수연의 농염한 자태들이 포스터로 제작되고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홍보카드(뒷면은 지하철 노선도, 앞면은 영화 사진)에 쓰이면서, TV나 신문 등 매체에서 짤막하게 소개될 때도 일부 신체 노출 장면이 과장되게 선정적으로 포장되면서 대중의 뇌리에는 일명 ‘야한 영화’로 인상이 굳어졌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보면, 심각한 신체 노출도 적나라한 성교 장면도 없다. 그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도 않다. 영화는 후손이 없는 양반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씨받이(대리모)를 들여 대를 잇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임권택 감독의 눈과 마음이라 할 카메라는 주인공 옥녀(강수연 분)와 그의 엄마 필녀(김형자 분)의 아픔, 대를 이어 씨받이가 되며 겪는 고통과 모성을 깊이 비춘다. 임권택 감독의 주제의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씨받이가 필요했던 이유의 근원에 대해 사회적으로 고찰한다. 그 시대적 근원이 무엇인지 영화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가닿아 볼까.


배우 강수연이 '제44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뒤 재개봉한 당시의 포스터 ⓒ출처=네이버블로그 oldcine 배우 강수연이 '제44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뒤 재개봉한 당시의 포스터 ⓒ출처=네이버블로그 oldcine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한 여인이 옷을 벗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혀 매혹적으로 벗지 않는다. 이유는 곧 드러난다. 나이 스물여덟, 결혼한 지 12년이 되었고 온갖 방도를 써보았건만 수태하지 못한 종가 맏며느리 윤 씨(방희 분)가 임신을 위해, 그것도 아들을 낳는 데 도움이 된다는 처방을 수행하기 위한 탈의였기 때문이다. 합방 전에 200~300번 배꼽에 쑥뜸을 떠야 한다는 지엄한 시할머니의 명, 문중의 기대 속에 윤 씨 부인은 괴로워하지만 거부하지 못한다.


장면은 거창한 문중 제사 의식으로 이어진다. 수십 명의 문중 남자들이 다 함께 제를 올리고 끝으로 여인들이 절을 올린다. 영화 ‘씨받이’에서 남자들이 모이면 공자를 섬기고 유학을 공부한 유생으로서 무엇이 인간의 도리이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계속해서 얘기한다. 인간이 죽으면 혼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담론하기도 한다.


간추리면, 사람이 죽었을 때 지붕 위에 올라가 입었던 상의를 흔들며 이름을 세 번 부르는 것은 육신을 두고 떠나는 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고, 따라서 초상 소상 대상을 지내는 동안엔 영혼이 집에 머무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육신은 묘에 있되 영혼은 후손 곁에 있는 것이고, 4대조를 모셔 제를 지내니 후손 4대가 가도록 영혼이 문중에 머무는 것이고, 4대가 지나면 5대조 이상 조상의 영혼은 묘로 돌아가 육신과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러하니, 4대 동안 곁에 머무는 조상께 계속해서 제를 올리는 것이 당연하고, 5대조 이상은 묘에 계시니 선산에서의 제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임권택 감독은 이에 대해 영화 도입부에 ‘죽은 자가 산 자보다 우대받던 시대’라고 명시했다.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우대받는 시대에서, 제를 올리는 주체가 남자인 사회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제를 올리는 신가네 종가에서, 종손인 신상규(이구순 분)에게 아들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절체절명의 사건인가. 상규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할머니(한은진 분)와 숙부 신치호(윤양하 분)는 애가 끓는다. 종손이었던 신치호의 형은 자식이라고는 상규 하나를 두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나마 대를 이어 제를 올릴 수 있는 아들이어서 천만다행인데, 그 종손인 상규에게 후손이 없다.


첫 합방. 신상규와 옥녀 사이에 앉은 윤 씨 부인 역의 방희는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탔다. ⓒ출처=네이버블로그 ehdmlrk 첫 합방. 신상규와 옥녀 사이에 앉은 윤 씨 부인 역의 방희는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탔다. ⓒ출처=네이버블로그 ehdmlrk

신치호는 상규의 할머니이자 자신의 어머니께 고한다. 제 아들을 형님댁에 양아들로 보내 종가의 대를 잇고자 해도, 저 또한 아들이 하나라 제집의 제를 모실 아들이라 양자로 보낼 수도 없으니, 절손하며 종가가 문을 닫기 전에 씨받이를 들여 아들을 보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씨받이는 천것 아니냐’는 어머니의 반응에 ‘양반의 씨’도 있다고 안심시킨다. 씨받이로 가서 딸을 낳으면 양반집에서 ‘(제사를 모시는 일에) 쓸모없다’며 내치니 적어도 아버지는 양반이라는 얘기다. 아내와 금술 좋은 상규가 씨받이를 내켜 하지 않자 숙부는 “인간이 대를 이어 조상께 제사함은 그 근본에 보답하려 함인데 어찌 이리 불효막심한고”라며 크게 꾸중한다.


사실 사람이 대를 잇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마가 자식을 낳고, 그 가운데 딸이 또 자식을 낳고, 또 낳으면 대대손손 이어진다. 그런데 유학이 절대적 종교처럼 유교로 자리 잡고 이를 추앙하는 유림이 조선사회의 주축인 상황에서, 인간의 도리-효-제사가 한 몸인 세상에서, 대를 잇는다는 것은 세대 재생산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제를 올릴 수 있는 남자가 있어야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고 조상에 대한 보답을 아는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함의 아래, 남자는 쓸모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굳어지고 ‘남아선호사상’으로 뿌리내렸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후손이 없는 것보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는 것이 칠거지악에 드는 죄인 것이고, 그 죄는 아기씨를 가지고 있는 상규에게는 묻지 않고 아기집을 지닌 윤 씨에게로 몰린다. 아직 기회가 있는 스물여덟의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12년 동안 수태하지 못한 게 윤 씨 부인의 죄이다. 해서, 윤 씨 부인은 씨받이 들이는 일에 반대할 수 없고, 되레 나서서 돕다 못해 남편과 옥녀의 합방을 방문 밖에서 눈물과 함께 지켜야 하고, 옥녀의 임신과 출산에 맞춰 거짓 임부와 산모 노릇을 해야 한다.


명대사는 필녀(김형자 분)의 입에서 나온다. “우리가 사람이냐, 사람 대우를 받아야 사람이지” ⓒTV조선 '마이웨이' 캡처화면 명대사는 필녀(김형자 분)의 입에서 나온다. “우리가 사람이냐, 사람 대우를 받아야 사람이지” ⓒTV조선 '마이웨이' 캡처화면

윤 씨 부인만 힘든가. 엄마 필녀와 딸 옥녀 얘기를 해보자. 얼굴 곱고 심성 고운 필녀는 가난이 힘겨워 씨받이가 되었다. 혼자 잘살자는 일이었으랴, 온 가족 위한 희생이었을 것이다. 아들을 낳았고, 삼칠일(21일) 만에 그 집을 떠나야 했다. 모든 걸 잊고 아들 낳아 주고받은 ‘허우채’로 먹고 살면 되지,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열 달 뱃속에서 키워 죽을 힘 다해 낳은 내 아이를 볼 수 없는 고통, 먼발치서라도 얼굴 한 번 보면 살겠는 열망을 무엇에 비교하랴. 참았다, 6년을 참았다. 죽도록 보고 싶어 찾아가서 골목 한 켠에서 한 번 품에 안아 본 대가는 평생 허리가 부러지는 고통을 남긴 곤장, 그리고 고향인 충북 보은 땅에서 쫓겨나는 일이었다. 씨받이들이 모여 산다는 깊은 산골 옥문골로 와 또 씨받이가 되었다. 딸을 낳았다. 딸이라 내주지 않고 딸과 함께 옥문골에서 살았다.


딸 낳았다는 소문에 씨받이 일을 주는 이도 없어 나물죽 끓여 먹고 소나무 껍질 벗겨 피죽 끓여 먹으며 사는데, 그래도 씩씩한 딸 덕에 웃으며 살고 있는데, 옥문골 촌장댁에서 옥녀를 부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입에 풀칠만 해도 ‘가슴에 꽝 꽝 대못 박힌, 여전히 생생하게 쑤시는 상처 남긴’ 씨받이 일을 내 딸에게만은 시키지 않으려고 아픈 허리 부여잡고 화전 갈며 살아왔는데 옥녀가 의뢰인(신치호)에게 간택이 된 것이다. 아들 낳는 ‘유자상’, 아들 못 낳는 ‘무자상’ 기준에서 옥녀는 딱 유자상이란다. “논 10마지기면 팔자 고치는 일”이라며 “엄마 허리 아픈데 이제 누가 나물 캐고 소나무 껍질 벗기고 송아지 꼴 주냐”며 희망과 걱정을 안고 옥녀는 떠난다.


아기를 낳자마자 데려가자 놀라는 옥녀(뒷모습)와 체념하는 필녀(맨 왼쪽) ⓒ출처=네이버블로그 ehdmlrk 아기를 낳자마자 데려가자 놀라는 옥녀(뒷모습)와 체념하는 필녀(맨 왼쪽) ⓒ출처=네이버블로그 ehdmlrk

사람 일은 장담할 수 없는 법. 두렵고 무서웠지만 열일곱 옥녀는 첫사랑을 한다, 군자로서 께름칙했던 상규지만 예의와 법도를 내려놓은 옥녀에게 욕망과 애정을 느낀다. 불같은 사랑은 잉태로 이어지고, 옥녀는 엄마 필녀를 ‘산 구완’으로 청한다. 엄마 필녀는 옥녀와 상규의 선을 넘은 관계에 기겁한다. 집 떠날 때 분명 “풀 포기 하나, 돌멩이 하나에도 정 주지 마라” 당부했건만 상규에게 깊은 정을 주고 있지 않은가. 영원하지 못할 관계임을 익히 알고, 그 정이 아이에게로 이어질 것을 알기에 딸이 받을 상처가 미리 아픈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필녀는 수시로 찾아드는 상규의 신발을 감추다 발각되기에 이르고, 아픈 허리에 다시금 곤장을 맞는다. 그들 기준에 귀한 종손 상규, 그들 기준에 천한 상것이기는 하나 아들일지 모르는 아기를 가진 임부 옥녀 대신 필녀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어느덧 산달에 이르러 옥녀는 출산하게 되는데, 죽을 고비를 넘기며 아기를 낳는 옥녀의 모습에 상규도 눈물을 흘린다. 아기를 갖고 뱃속에서 키우도록 누구 눈에 들켜 구설에 오를까 싶어 옥녀를 방안에 감금하다시피 했던 양반 그들인데, 옥녀를 아끼는 상규를 두고 볼 리 없다. 무엇보다 원하는 아들을 얻었잖은가. 몸조리할 새도 없이 출산 당일, 외딴 산촌에 붙은 논의 문서라며 죽은 듯 숨어 살라는 당부와 함께 방출한다.


“논문서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내 아이 내놓으라”는 옥녀의 울부짖음. 열일곱에 뭣 모르고 씨받이로 만나 첫사랑에 빠졌던 철없는 옥녀는 온데간데없고, 임신과 출산의 시간 속에서 어미가 된 모습이다.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보는 눈 없는 야밤에 가마에 가마를 바꿔 타며 쫓겨나는 옥녀 모녀. 옥녀가 집을 떠나기 전 필녀가 했던 말, “우리가 사람이냐, 사람 대우를 받아야 사람이지”. 내 품에서 키우지 못할 아기를 낳는 일, 양반 그들에게 목숨보다 귀한 아들을 낳아 주고도 쫓겨나는 딸. 딸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달래고 쓰다듬는 엄마의 손길.


한국 최초 세계 3대 영화제(칸,베니스,베를린) 여우주연상 수상에 빛나는 강수연 ⓒ네이버 영화정보 한국 최초 세계 3대 영화제(칸,베니스,베를린) 여우주연상 수상에 빛나는 강수연 ⓒ네이버 영화정보

영화는 충격적으로 끝을 맺는다. 순한 필녀가 6년을 참았다면, 옥녀는 1년 만에 돌아온다, 아들이 사는 그 마을로. 엄마보다 뜨거운 피를 지닌 옥녀는 제 모든 것을 걸고 자식에 대한 사랑, 연인을 향한 그리움을 하늘에 건다. 그 아픔이 전해 와 눈물을 참기 힘든 결말이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지만, 영화가 제작된 20세기 후반(1986년)에도 잔재가 여전했던 남아선호사상. 임권택 감독은 그 뿌리를 찾아 우리 눈앞에 선명히 보여 줌으로써, 그 뿌리를 흔들었다. ‘죽은 자가 우대받던 시대←제사를 모시는 남자←남아선호사상←씨받이’. 임권택 감독은 사람인 여성을 사람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아기 낳는 도구처럼 취급하는 씨받이를 들여서까지 ‘아들’을 낳으려 했던 비뚤어진 열망의 근원을 ‘죽은 자가 우대받던 시대’에서 찾고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제사를 모시지 못하면, 대를 이어 제를 올릴 수 없으면, 가문의 대가 끊기는 것이요 종가를 닫는 것이요 인간의 도리를 못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시대. 2021년 오늘, 단 한 명이라도 그 어둠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를.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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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onard 2021.03.16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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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
    
    @
    
    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 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http://blog.daum.net/macmaca/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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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onard 2021.03.16  04:57
    하느님의 종교인 수천년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의 정체성을 확실히하고, 하느님과 별개의 철학인 도교,불교를 이해하는것도 어느정도 필요합니다.도교는 유교처럼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天生蒸民)하신 점에 주안을 두지 않고, 후대에 갈수록 불교의 보살같은 용어도 사용하여, 동아시아 세계종교로 수천년 이어진 유교의 하느님(天).공자님과 맞지는 않습니다. 불교는 원래부터 창조신 브라만에 항거하여 부처가 새로 만든 후발신앙으로 브라만을 섬겨온 인도에서도 다시 배척받게 된 인도발 신앙입니다. 창조신보다 높다는 Chimpanzee류의 부처를 받드는 무신론적 Monkey철학임을 염두에 두고, 불교와 섞인 후대의 중국 도교도 그런 위험을 가지고 있는 철학임을 염두에 두고 철학.민속적으로만 접근해야 합니다.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 공자님의 시호.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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