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서울 "그래, 나도 월급쟁이가 되자!"

입력 2007.09.15 08:41  수정

<데일리안 대선기획> ´유력 대통령후보, 그는 누구인가´ 이명박 <3>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가난에 ´대학 중퇴´ 목표로 입시공부를 시작하다´

“나는 부정한 부자보다는 깨끗한 가난을 택할 것이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단지 불편할 뿐이기 때문이다.” - 이명박,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2002) 중에서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마친 이명박 후보는 졸업식을 앞둔 1959년 12월 여동생과 함께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줄곧 ‘전교 1등’을 해온 터라 졸업 때 학교 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상장까지 받기로 돼 있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가족들은 대학에 진학한 둘째 형 상득씨(현 국회부의장)의 뒷바라지를 위해 이미 1년 전 서울로 떠난 터.

19년간의 포항 생활을 접고 서울 하늘 아래 첫발을 내딛었지만, ‘가난’이란 꼬리표는 좀처럼 그를 떠날 줄 몰랐다.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후보가 17대 대선 ´D-100일´이던 지난 10일 서울 이태원동에서 직접 손수레를 끌며 환경미화원들과 함께 새벽 청소에 나서고 있다. 이 후보는 대학 재학 시절 이태원 재래

이태원 판자촌의 단칸방.

어머니는 시장 한 켠 노점에서 채소를 팔았다.

방이 너무 좁아 같이 잘 수가 없어 일용직 노동자들의 ‘합숙소’에 들어갔다.

매일 새벽 5시만 되면 일자리를 찾아 달동네 산꼭대기에서부터 허겁지겁 달음질을 쳐야 했다.

지금도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않는 생활 습관이 그의 몸에 밴 이유다.

“젊은 사람이 이런 험한 일을 할 수 있겠어?”

어려서부터 안 해 본 일이 없던 터라 “뭐든 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아무런 기술도 없던 그에겐 허드렛일 구하기마저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인력 시장에 나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오던 어느 날, 매일 같이 어디론가 출근하는 사람들을 부러운 마음으로 쳐다만 본다.

“나도 번듯한 직장에 매일 출근해 일하고 월급 받는 ‘월급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월급쟁이’가 되자!”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빠듯했던 야간 상고 출신의 ‘청년’ 이명박에게 ‘월급쟁이’가 된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학교 졸업자보다는 고등학교 졸업이 낫고,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낫지 않을까. 시험을 쳐서 붙기만 한다면 대학 중퇴자가 될 수 있을 텐데….”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취직에 도움이 될 것이란 단순한 생각에서 며칠간의 일당을 모아 청계천 헌 책방을 찾는다.

자초지종을 설명 들은 책방 주인으로부터 헐값에 참고서를 구한 그는 낮에는 노동일로, 밤에는 입시 준비로 주경야독(晝耕夜讀)한 끝에 1961년 고려대 상과대학에 합격한다.

1960년대 고려대 재학 시절의 이명박 후보(윗줄 왼쪽 끝).

오로지 ‘대학 중퇴자가 되기 위해’ 가족들 몰래 불면제를 먹어가면서까지 공부한 그였지만 기쁨도 잠시 뿐.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중퇴자’마저도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이 후보는 또 한 번 가난의 ‘벽’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와 함께 일을 하던 이태원 시장 상인들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시장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 자리를 마련해준 탓에 이 후보는 가까스로 대학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매일 새벽 손수레에 쓰레기를 가득 싣고 한강변 반포대교까지 나가 내다버리는 고된 일이었지만, 이 후보는 그저 즐겁기만 했다고 한다.

꿈도 꾸지 못했던 대학 졸업장을 그에게 안겨준 ‘소중한 일자리’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너무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늘 도전하고 또 긍정적으로 살려는 노력으로 인해 내성적이던 내 성격도 많이 바뀔 수 있었다.”

이 후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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