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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감독, 베트남을 감동시키다


입력 2018.01.24 09:20 수정 2018.01.25 00:25        임성빈 기자
ⓒMBC 사진자료 ⓒMBC 사진자료

박항서 감독에 대한 관심과 성원이 베트남을 넘어 대한민국에도 미치고 있다.

23일(한국시간) 중국 창저우의 창저우 올림픽 스포츠센터에서 열린 카타르와의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4강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은 2대 2로 경기를 마친뒤 승부차기 끝에 카타르를 5대 3으로 꺾고 결승에 올랐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며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박항서 감독은 험난한 지도자 생활을 이어왔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도 아니었던 박항서 감독은 오직 축구에 대한 열정만으로 축구와의 인연을 이어왔다.

U-20 청소년대표를 지냈던 박항서 감독은 1981년 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1984년 럭키금성(FC서울의 전신)에서 1988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이후 자신이 뛰었던 럭키금성에서 코치로 지도자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4년 월드컵 대표팀의 트레이너로 국가대표 지도자의 길을 시작한 박항서 감독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수석코치로 발탁됐다. 당시 대한민국은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본선 진출을 확정했을뿐 성적에서는 기대를 받지 못했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많은 지도자들이 지나갔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며 선수들과 히딩크 감독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박항서 감독은 대한민국 축구 최고의 업적인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했다. 하지만 이는 박항서 감독에게 멍에로 다가왔다. 눈높이가 높아진 팬들과 협회는 히딩크만큼의 성적을 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 2002년 아시안게임의 대표팀 감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감독의 길로 들어선 박항서 감독은 경남FC, 전남드래곤즈, 상주 상무의 감독을 지냈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급기야 실업팀 창원시청의 감독을 맡은 후 지난해 10월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박항서 감독은 부임 초기 베트남 언론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분위기가 바뀌었다. 베트남 언론은 박항서 감독에 대해 '베트남 히딩크'라는 별명을 선사하는 것은 물론 베트남 총리가 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를 전하는 등 베트남의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박항서 감독은 대한민국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한양대학교 출신이지만 스타 플레이어가 아니었고, 축구계에서도 비주류로 불리던 박항서 감독이 설 자리는 대한민국에 없었다. 또한 히딩크의 그림자는 그에게 족쇄에 가까웠다. 당장의 성적이 급한 대한민국의 풍토에서 협회는 물론 구단도 박항서 감독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모험에 가까웠던 베트남 행을 선택한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에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아시아에서도 축구 불모지에 가까웠던 베트남에 축구 한류를 일으켰다. 그의 축구가 완성됐거나 꽃을 피웠다고 말할 수 없지만 박항서 감독이 능력있는 지도자란 사실은 입증된 것이다.

한국의 축구팬들은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에서의 성공을 축하하면서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 또다른 한류를 일으켜주길 바라고 있다.

문지훈 기자 (mtrelsw@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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