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가 55년 만에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에서 아쉽게 고배를 들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31일(한국시간) 호주 시드니의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2015 호주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결승에서 개최국 호주와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지만 1-2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졌지만 결코 진 것 같지 않은 패배였다.
대표팀은 이번 대회 첫 실점 후 후반 막판까지 0-1로 끌려가며 패색이 짙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동점골을 노린 끝에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이 극적인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이는 마치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골 승리를 거뒀던 2002 한일월드컵 16강전이 연상됐다.
다만 연장 전반 종료 직전 호주에게 결승골을 허용, 최종 결과만 달랐을 뿐이다. 경기 직후 슈틸리케 감독은 “내 가슴 속에 깊이 우러난 말이 있어 한국어로 준비한 게 있다”며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우리 선수들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날 결승전 한 경기만 놓고 본다면 참으로 아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지만 대표팀이 조별예선에서 결승까지 올라오는 과정, 그리고 이날 결승전에서 한 편의 각본 없는 드라마를 써내려 가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분명 자랑스러워할 행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슈틸리케 감독은 “우승컵을 호주와 2년씩 나누어 보유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분명 그럴 만했다.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의 참담한 실패 후 성난 팬들로부터 이물질 세례를 받아야 했던 대표팀은 불과 수개월 만에 다시 온 국민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팀으로 변신했다.
이번 아시안컵을 통해 한국 축구는 과거 영화에 기댄 ‘자칭 아시아 축구 맹주’가 아닌 자타가 인정하는 팀임을 증명해냈다.
한국 축구는 브라질 월드컵에서 이전 보다 훨씬 크게 떨어진 세계 축구와의 격차를 실감하며 초라한 성적으로 마쳤다. 소위 ‘엔트의리’로 통칭되던 인맥축구 논란을 빚었던 홍명보 전 감독에 대한 경질 여론도 높았지만 반면 그에게 계속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홍 전 감독이 비록 브라질월드컵에서 큰 실패를 경험했지만 앞서 연령별 유소년 팀을 지도하며 좋은 성과를 올렸고, 특히 2012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축구 사상 첫 메달 획득하는데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점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다.
또한 홍명보 전 감독의 사퇴 후 후임으로 국내 또는 외국인 지도자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 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그러면서 거스 히딩크 감독 이후 제법 이름값 높은 외국인 감독들 가운데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둔 지도자가 없었다는 점은 외국인 지도자의 효용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했다.
슈틸리케호의 여정은 앞으로가 더 기대가 된다. ⓒ 연합뉴스
하지만 아시안컵을 모두 끝낸 현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홍 전 감독의 사퇴와 외국인 지도자 슈틸리케 감독의 부임은 결과적으로 한국 축구에 참으로 잘 된 일이 됐다.
슈틸리케 감독은 외국인 지도자로서 한국 축구계의 고질적 병폐로 여겨져 온 ‘연’과 ‘맥’에서 자유로웠고, 아시안컵이 코앞에 와 있는 상황에서도 K리그 클래식 경기뿐만 아니라 K리그 챌린지, 유소년 대회 등을 찾아다니며 선수들을 발굴, 이정협과 같은 ‘흙 속의 진주’를 찾아냈다.
오로지 선수의 특성과 경기력만을 기준으로 자신이 정한 원칙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따져 선수를 선발하고 기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외국인 지도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으로 슈틸리케 감독은 대표팀 선수들의 정신력을 끌어올리고 이기는 축구를 하는데 있어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지난 13일 오후 쿠웨이트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1-0으로 승리, 8강 토너먼트를 확정지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승 후보가 아니다”라는 말로 대표팀 선수들을 우회적으로 질타했다. 선수들의 자존심을 자극한 슈틸리케 감독의 ‘셀프 독설’은 이후 대표팀이 환골탈태한 경기력으로 승승장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려와 걱정 속에 출범했지만 성공적으로 아시안컵 항해를 마친 지금 슈틸리케호를 바라보는 심정이 뿌듯한 이유는 여정의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점 때문이다.
과거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들의 축구에 대한 생각, 접근법, 경기에 임하는 태도를 뜯어고치는 것이 급선무다. 이는 누구를 원톱 공격수로 쓰느냐, 득점을 어떻게 이루느냐 등의 전술적 문제를 논하기 전에 반드시 미리 해결해야 할 원리적인 문제"라고 운을 뗀 뒤 "내가 원하는 것은 선수들이 주도적으로 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선수들뿐만 아니라 팀도 색깔을 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슈틸리케 감독이 한국 축구계와 대표팀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개개인이 경기를 주도하는 선수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경기를 풀어갈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새로운 개념의 토털사커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이말 속에서는 슈틸리케 감독이 앞으로 추구하고, 만들어가고 싶은 한국 축구의 새로운 모습이 담겨 있었고, 이번 아시안컵에서 그 일부가 살짝 모습을 드러났다. 전체가 아닌 일부를 봤지만 이를 통해 미래의 ‘슈틸리케 코리아’가 상당히 근사한 모습을 갖출 것임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어찌 보면 27년 만의 아시안컵 결승 진출과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둔 슈틸리케호의 여정이 지금껏 온 길보다 앞으로 갈 길이 훨씬 더 멀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쁘고 기대가 된다.
슈틸리케 감독은 호주와의 결승전 직후 인터뷰서 "한국 축구의 문제점 하나만 얘기하고 싶다"며 "대다수 선수들이 학교에서 축구를 배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선수들에게 승리하는 법을 가르칠 뿐 축구를 즐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으로 그가 이끌 대표팀의 변화도 기대가 되지만 이와 같이 한국의 유소년 축구에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에서 또 다른 차원의 희망을 가져본다.
슈틸리케호는 앞으로 2018 러시아 월드컵을 향한 긴 항해를 준비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이 지닌 축구에 관한 패러다임을 전파하면서 대표팀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계 전체에 대한 체질개선을 도모하게 될 것이다.
슈틸리케 감독이 가진 축구철학과 지도자로서의 능력이 한국 축구에 긍정적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은 이번 아시안컵을 통해 충분히 검증됐다. 그리고 그에 대한 축구계 전체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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