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모순 외면하는 '외눈박이 역사교과서'는 그만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3.06.29 10:42  수정 2013.06.29 10:46

<굿소사이어티 칼럼>대한민국 건국의 의의 부정하는 철지난 수정주의 바뀌어야

지난 2011년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대강당에서 열린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공청회에서 강원대학교 손승철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 시민사회는 역사 기억을 둘러싼 내전(civilwar)이 진행중이다. 2002년 7차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검정과정에서 촉발된 이 전쟁의 포화는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2010년 검정을 통과해 2011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6종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나온 후 다시 한번 불붙기 시작했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들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빛과 어두움, 그리고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끈 이들의 공과(功過)를 균형 있게 서술하지 못했다는 세평의 십자포화가 쏟아지자 발간 3개월이 못되어 재개정의 도마에 올랐다. 그 결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둘러싼 헌법논쟁을 거쳐2011년 8월에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육과정이 개정됨에 따라 논란을 빚던 용어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로 확정되는 등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갖고 있던 문제점을 해소할 실마리가 마련되었다.

이 글에서는 현행 교과서에 보이는 냉전 붕괴 이후 학설로서의 존립 기반을 잃은 수정주의(修正主義, revisionism)사관과, 민족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의 완성을 지고의 가치로 하는 통일지상주의사관에 입각한 서술의 문제점을 살펴봄으로써 보다 나은 교과서를 만들기 위한 대안 모색에 나름의 생각을 보태보려 한다.

스탈린, 마오쩌둥 등 적색(赤色) 전체주의 비판 결여됐다

현행 교과서들에 보이는 수정주의 사관의 문제점 중 주목해야 할 점은 적색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의 결여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 같은 백색(白色)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서술은 6종 교과서 모두에 차고 넘친다. 그러나 스탈린과 마오쩌뚱 치하의 소련과 중국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이는 냉전시대 좌파성향 서구지성들의 소련과 중국에 대한 호의적 평가를 답습한 것으로 냉전 붕괴 후 발굴된 사료와 연구 성과에 반(反)하는 서술이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폴란드의 엘리트집단 약 2만여 명을 사살한 1940년 카틴(Katyn)숲 학살이 히틀러가 아닌 스탈린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구소련의 기밀문서 등이 공개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소련이 범한 대량학살의 역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서구 좌파 지식인들조차 종래의 입장을 바꾸어 적색 전체주의 시대의 악행을 비판하기 시작했음은 1997년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이 펴낸 <공산주의 흑서(黑書)>('The Black Book of Communism-Crimes Terror Repression'), 특히 1988년 브루스커밍스와 함께 수정주의 사관에 입각해 6.25전쟁에 관한 책을 썼던 할리데이(Jon Halliday)가 2005년 펴낸 평화기에 7천만 명의 자국민을 죽인 마오쩌뚱의 책임을 추궁한 연구('Mao: The Unknown Story')가 잘 말해 준다.

이처럼 적색 전체주의의 악행(惡行)이 세계 학계에서 객관적 사실로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과서가 이에 대한 비판에 눈감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냐하면 교과서가 민족통일을 최우선 가치로 둠으로써,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의 모순이나 인권문제에 대한 서술을 외면하려 하기 때문이다.

광복 전후 미•소의 한반도 정책 서술의 편향성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남한을 반공 보루를 만들기 위해 분단을 주도한 미국에 있다고 보지만, 이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부각하기 위한 목적론 연구에 지나지 않는다.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통설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소련의 동북아 정책을 구명(究明)해 아시아에서 냉전의 기원을 밝힌 연구들에 의하면 38도선이 획정된 배경과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45년 6월 소련 점령 하 폴란드에서 미국과 영국의 반대를 꺾고 공산정권이 수립되기에 이르자 미국은 일단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소련을 제거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에 미국은 얄타협정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이전에 전쟁을 끝내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로 진군했다. 스탈린은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 대가로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을 얻기 위해서였다. 당시 미군이 1천Km 남쪽 오키나와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소련이 마음만 먹었으면 한반도 전역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음에도 미국의 제안을 수용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런던외상회의는 한국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종래 한국학 연구자들이 그 중요성을 간과했지만, 회담 결렬 이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됨으로써 한반도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당시 스탈린은 일본 통치 참여가 좌절되자 회의가 열리던 중인 1945년 9월 20일 소련군 점령 하 북한에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1946년에서 1948년까지 중국 공산당의 후방기지로 북한을 제공함으로써, 동북아지역에서 미국과의 협조관계를 중단하고 대결관계로 전환하였다. 즉 남북분단은 일본 통치에 참여와 지중해 진출 기도가 좌절되자 자국의 안보에 직접 관련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스탈린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과서들은 스탈린이 북한에 정부 수립 지령을 내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런던외상회의에 대한 언급 없이 미·영·중·소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와 그 결정을 이행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행에 대해서만 서술함으로써 남북분단에 대한 소련의 책임을 희석시키고 있다.

그 결과 교과서들은 분단의 책임이 미국과 소련 양국 모두에게 있고, 특히 소련의 점령정책이 간접통치였던 것에 비해 미군정이 직접통치를 행했음을 부각하거나, 스탈린의 북한 점령 정책이나 9월 20일자 스탈린의 정부 수립 지령에 관한 1차 자료는 제시하지 않고 군정 실시에 관한 9월 9일자 맥아더 포고문 같은 미국 측 자료만 실음으로써, 소련은 수세적이었고 미국은 공세적으로 패권을 추구한 것으로 묘사하는 편향된 서술을 하고 있다.

건국을 위한 독립운동 방법론 서술에 보이는 편파성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문제 처리에 미국과 소련은 모두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내세웠지만,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을 지원함으로써 세계 공산주의혁명을 촉진하려한 레닌(V. I. Lenin)과 국제연맹 하의 위임통치를 통한 자유무역체제의 구축을 꾀한 윌슨(Woodrow Wilson)의 해법은 달랐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파리강화회의(1919)와 워싱턴 군축회의(1921. 11~1922. 2)에서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얻으려했지만 미국은 이를 묵살했다.

반면 1919년 8월 9일 제2인터내셔널 참가 24개국이 만장일치로 한국의 독립보장을 결의하였고, 소련은 1920년에는 상해 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나아가 1922년 1월 제1차 극동인민대표자대회는 워싱턴군축회의에서 서구 열강이 한국의 독립 요구에 대해 외면한 것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프롤레타리아혁명, 즉 계급해방으로 발전시킬 것을 촉구하였다.

이 회의에 참가한 56명의 한국대표들은 코민테른을 그들의 구원자로 환영하였으며,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자가 될 것을 공언하거나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공산주의자들에게 조국은 만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국 쎄쎄쎄르(소련)”였으며, 그들과 연대를 모색한 이들은 “세계 혁명의 승리를 위한 투쟁을 위해 이용”할 대상일 뿐이었다.

반면 국내에서 실력양성운동을 펼친 이광수와 윤치호, 미국에서 외교독립활동을 전개한 이승만, 중국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펼친 김구•이범석•지청천 등 민족주의자, 이회영과 김종진 등 아나키스트, 그리고 조소앙과 장근상 등 사회주의자 등은 공산주의에 반대했으며, 이들은 독립운동 방법은 달랐지만 모두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상으로서의 반공” 노선을 견지하는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교과서들은 “1920년 레닌의 코민테른 가입21개조가 발표된 이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역사적으로 확연히 구별되었던 점”을 무시하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사회주의로 서술함으로써 공산주의에 반대한 반공 좌파인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자들의 계급혁명운동을 혼동하게 하는 우(愚)를 범했다. 즉 1919년에 제창된 윌슨과 레닌의 민족자결주의를 서술하면서 그 차이점을 밝히지 않거나, 1920년대 공산주의자들의 계급혁명 투쟁을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이자 민족운동의 한 갈래로 보아, 이들이 민족주의자 등 다른 세력과 연합전선을 펼친 이유가 공산혁명 도모에 이용하려는데 있었음을 명확히 서술하지 않고 있다.

또한 교과서들은 외세에 기대지 않는 자주적 독립, 즉 무장투쟁만이 정당한 독립운동방법론으로 보아, 광복이 우리가 전개한 무장투쟁의 결과 얻은 것이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한 것임이 역사적 현실임에도 교과서 집필자들은 그들이 이상시한 무장투쟁에 의한 자주적 독립을 등가치적(等價置的)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교과서들은 30면 이상씩인 독립운동 관련 서술에서 외교독립활동을 펼친 이승만에 대한 서술은 한 면을 넘지 못할 정도로 소략하다.

반면 무장투쟁의 경우 민족주의진영과 공산주의의 계열의 운동을 불문하고―실천에 옮겨지지 않은 계획뿐이었던 경우에도―교과서 모두 6면에서 10면에 이르는 지면을 할애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교과서들은 국내에서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민족주의자들이 펼친 1920년대 이후 펼쳐진 물산장려운동 등 실력양성운동의 경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실패한 운동으로 비판적으로 평가절하 하는 반면, 공산주의의 영향 하에 전개된 적색 농민•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두 세배에 달하는 지면에 그 경과는 물론 영향과 역사적 의의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과서들은 공산주의 영향 하에 일어난 사회운동과 무장 독립투쟁의 목표가 민족독립인지 계급해방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묘사하고, 좌우를 막론하고 무장투쟁만을 정당한 독립운동 방법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이들이 이루고자 한 독립 이후의 국가체제가 “토지 개혁, 주요 산업의 국유화, 친일파 청산 등으로 요약되는 사회주의체제”였던 것으로 서술한다. 이러한 서술은 일제치하 한국은 이미 “사회혁명(social revolution)” 즉 계급혁명의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세 개입이 없었으면, 건준과 인민위원회에 의한 사회혁명이 성공했을 것인데 남한을 점령한 미국과 친일지주 세력인 한민당이 이를 압살했다는 수정주의 역사가 브루스커밍스의 학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의를 부정하는 교과서

교과서 집필자들은 무장투쟁에 의한 자주적 통일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이상적 당위를 쫒음으로써 남북분단이 민족 내부의 역량으로 극복할 수 없었던 역사적 현실이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결과 교과서들은 광복 직후 초대대통령 감으로 김구를 압도하는 지지를 얻은 바 있던 이승만을 국내 민중들 간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노쇠한 망명정객에 불과했던 것으로 폄하하는 반면, 통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에 나섰던 김구나 소련군 휘하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펼친 김일성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서술한다.

또한 남북협상에 나선 김구와 김규식의 활동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그 전말을 서술하지만, 통일 민족국가 수립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국제정치 환경 즉 미국의 정책변화나, 김구의 남북협상을 북한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이용한 소련 통일전선 전술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이승만의 집권을 남한을 반공보루로 만들려 한 미국의 전략에 힘입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최신연구에 의하면, 미국은 중국 국민당이 내전에서 공산당에게 패색이 짙어진 1947년 4월 종래의 관망(Wait-and-See)”정책을 폐기하고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9월에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단정 수립의 짐을 유엔에 떠넘긴 것이었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볼 수 도 있다. 그러나 1946년 6월 3일 세계 공론에 호소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한 정읍 선언이나,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처음으로 제의한 이승만의 단정 수립 전략은 미국이 유엔을 통한 남한 단정 수립을 결정한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대한민국 건국의 주도자였다.

반면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 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남북협상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조언을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이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그러나 교과서들은 통일지상주의 사관에 입각해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이용해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을 서술하지 않음으로써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한다.

이처럼 민족을 단위로 하는 국민국가의 건설을 지고(至高)의 가치로 삼는 통일지상주의 사관에 입각한 교과서들은 통일 이전에 건국된 대한민국을 미완의 국민국가로 보아 “정부 수립”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국민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통일 민족국가 건설 과정의 역사로서 북한사를 대한민국의 역사와 동등한 수준으로 다룬다. 또한 민족통일을 교과서 서술의 최우선 가치로 둠으로써, 대한민국의 권위주의 체제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의 커다란 차이점을 무시하고 통일지상주의에 입각해 북한체제의 모순에 대한 서술을 외면하고 있다.

바람직한 교과서 서술을 위한 제언

교과서란 국민국가의 국민통합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매체다. 글로벌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는 젊은이들을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유목민이자, 태어난 강물을 기억해 회귀해 산란하는 연어와 같은 인재로 길러야 한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자국사 교육을 중시하는 이유는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되 연어와 같이 모국에 기여하는 삶을 살길 미래세대에게 바라기 때문일 터이다. 연어와 같은 모천(母川) 회귀를 이끄는 미래세대의 정체성은 태어나고 자란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자긍과 성찰에서 배양된다.

식민지 지배와 동족상잔의 아픔과 폐허를 딛고 다시 일어서려 할 때. 침략자 일본보다 긴 반만년의 역사나 우수한 문화를 내세우는 금송아지 자랑이나 내재적 발전론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필요했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과 성공의 요인을 제대로 밝히지 않는 모호한 역사서술은 학습자에게 어떠한 교훈과 지혜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새로운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민족사의 틀을 넘어 비교사적 국제사적 시야에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근대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독립을 일구어 내지 못한 이유를 성찰하는 동시에 광복 이후 오늘의 성공을 이끌어 낸 요인을 인과관계에 맞게 서술해야 한다. 나아가 새 교과서는 통일된 국민국가의 완성이라는 미완의 근대과제와 함께 환경을 지키는 녹색성장,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양성평등사회와 다문화 사회의 구현이라는 근대 이후 과제도 살필 수 있는 깨어 있는 주체로서 미래세대를 키울 수 있도록 쓰여야 한다.

“은나라의 거울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 시대인 하나라에 있다(殷鑑不遠在夏后之世)”는 옛 중국의 경구(警句)처럼, 먼 조상이 아니라 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의 역사가 우리의 진로를 비추는 등대이다.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이루고 경제적 번영도 일군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우리 미래세대의 정체성과 자긍심은 바로 앞 세대가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나는 과정에서 어떤 성취와 과오를 일구고 범했는지를 알려 주는 데서 길러진다.

지난 역사가 남긴 빛과 어둠에 대한 자긍과 성찰이 균형을 이루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함께하는 역사교육이 행해질 때 우리 젊은이들은 글로벌 한 세상을 뚫고 나갈 진정한 정체성과 지혜를 얻을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이룬 기적과 같은 성취에 대한 자긍과 그 과정에서 빚어진 과오에 대한 성찰이 균형 있게 서술된 교과서 만들기는 더없이 중요하다.

글/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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