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몰될 포천 보개산성, 연평도만큼 요충지였다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입력 2010.11.30 12:36  수정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천연세월 간직한 대규모 성벽‥궁예의 전설만 남아

"3년 후면 보개산성 답사는 배를 타야만 갈 수 있습니다. 산성 아래까지 물이 찬답니다. 한탄강 댐이 2012년에 완공되면 중리일대는 수몰됩니다."

포천시 문화관광해설사 한웅씨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보개산성을 기자 일행과 동행하면서 "오늘 산성답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산성으로 가는 길목의 중리마을은 이제 빈집들이 듬성듬성 보였고 스산했다.

보개산성 정상의 성벽

11월 중순 명성산성을 정복한 후, 지난 24일 또 다시 험준한 보개산성 정상을 향해 올랐다. 북한이 연평도 무력침공을 일으킨 다음날이다. 전운이 감도는 긴장 속에서 우리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호국의 현장을 찾았다. 일행은 말이 없었지만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연평도 도발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 기자는 장성한 아들을 데리고 훈련소 연병장까지 배웅했다. 국방의무로 자원입대한 것이다. 군복무 면제를 받으려고 자신의 몸에 온갖 위해를 가해 잔꾀를 부리는 일부 젊은이들에 비하면 대견스럽다. 불안한 시국에 자식을 군에 보내야하는 부모 마음이야 초조하고 심란하지만 자진 입대하는 이런 젊은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 험준한 산성을 마다않고 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산등성이를 오르는 발길에 힘이 솟는다.

서북쪽 회절부 성벽

보개산성은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중리마을 지장계곡에 있다. 계곡은 꽤나 깊다. 산성 아래서 정상 잘루맥이 고개까지 4km가 넘는다. V자 협곡으로, 계곡입구는 좁지만 안쪽으로 갈수록 넓어진다. 왼쪽에는 삼형제봉과, 오른쪽은 관인봉이다. 비포장도로인 계곡을 따라 자동차로 2km 들어가면 오른쪽에 산성안내판이 나온다.

이곳에서 산줄기로 고개를 들면 골짜기를 막은 성벽이 또렷하게 보인다. 성벽은 주변에 있는 바위를 절취해 적당히 다듬어 쌓았다. 현재 이 구간에 남아있는 성벽 길이는 중간에 끊어진 구간을 포함해 70m, 높이가 6m 이내다. 성벽 오른쪽은 가파른 암벽이 자연성벽이 됐다.

다시 내려와 지장계곡을 따라 100m 정도 올라가면 또 하나의 성벽이 골짜기 위에 있다. 약 20m 정도의 석축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흔적이 없다. 또 다시 내려와 계곡을 따라 조금 더 가면 오른쪽 계곡건너편 잡목에 가린 성벽을 볼 수가 있다. 첫 번째 골짜기에서 본 성벽만큼이나 웅장하다. 성벽 길이는 훼손구간 포함해 40m 정도다.

급경사 위에 쌓은 성벽

특히 이곳에는 산성의 핵심인 성문지와 건물터, 수구가 온전하게 남아 있다. 성문은 성벽 왼쪽 높은 지형에 설치했고, 양쪽에 석축을 쌓아 통로를 냈다. 건물터는 성벽안쪽에 있는데 30m 정도의 평지다. 수구는 건물터 아래 성벽하단에 있다.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인데 매우 견고해 보인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무너진 성벽을 타고 정상으로 올랐다. 산줄기는 급했다. 온전했던 성벽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 붕괴됐고, 성벽이 있다 해도 지탱할 수 없을 만큼 급경사 지형이다. 산행은 급하게 서두르면 중도에서 지친다. 항상 같은 보폭으로 올라야 한다. 산행에 동행한 포천시 문화관광해설사인 이정옥 씨는 무릅까지 쌓인 낙엽을 헤치며 걷다가 수없이 미끄러지곤 했다.

성벽의 여장

해설사 경력 2년차인 있는 이 선생은 대학에서 관광과를 전공했다. 관광인솔 자격증을 습득한 후 해설사가 됐다. 문화재나 관광지 답사를 많이 했지만 산성은 처음이라고 했다. 망대로 보이는 성벽에 먼저 도착한 이 선생은 "참 신기합니다. 옛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면서 무슨 이유로 이렇게 웅장한 산성을 쌓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더구나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중에 말입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산성 대부분은 깊은 산속 또는 전망 좋은 곳에 쌓았다. 이는 문명이 개발되지 않던 시절적의 동태를 살피고, 종족을 보존하며 장기간 항전에 대비할 수 있는 곳으로 산성만큼 안전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급경사를 지나자 산 중턱 성벽부터는 다시 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암벽과 이어진 성벽바깥은 암벽을 이용해 직각으로 축조했다. 성벽 사이에 납작한 돌을 끼워 놓은 것을 보면 어느 석공의 작품을 보는 것 같다. 특히 이곳에는 보개산성에서 유일하게 여장이 남아있는 구간이다. 여장길이는 6m 정도인데 중간 훼손된 구간이 있지만 그래도 완전하게 남아있다. 여장에서는 계곡 아래의 움직임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여장 끝에는 망루로 추정되는 성벽도 보인다.

망대로 추정되는 성벽

보개산성이 언론에 알려진 곳은 산 아래 있는 성벽뿐이었다. 그 이상은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우리일행은 천년동안 베일에 가려있던 산성을 뒤집고 다니면서 특이한 형태를 발견하면 흥분을 감추질 못했다. 8부 능선 성벽에서 총안 형태도 발견됐다. 협곡에는 펀펀한 건물지도 보였고,치성형태의 석축도 보였다. 정상주변 산등성이는 성 돌이 쏟아져 내렸다.

어느 시대, 어떤 세력이 이런 대규모의 산성을 축조했는지 의문만 더해진다. 함께 간 김성수 씨는 현 상태로 유적을 보존하는 것이 최선이며, 알려지면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훼손될까 걱정이라고 했다.

보개산성은 관인봉(717m)을 중심에 두고 성벽은 좌우로 흘러내렸다. 복쪽에서 동쪽방향의 성벽은 칼날 같은 암벽이 자연성벽이 됐다. 사람이 접근하기 쉬운 지형에는 돌로 쌓았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은 관인봉에서 동쪽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가는 봉우리 사이다.

잘 다듬어진 성벽

보개산성의 성벽 전체 둘레는 4km가 넘는다. 경사가 심한 지형에는 성벽이 흘러내렸지만, 완만한 곳은 보존상태가 좋았다. 산성 전체를 볼 때 30%의 성벽은 온전한 상태다. 대체적으로 성벽 높이는 2~6m이내다. 가장 잘 남은 곳은 지장계곡과 나란히 연결된 골짜기 3곳을 막은 구간이다. 1구간에서는 내성이 발견되기도 했다. 전체 둘레는 327m로 높이는 2,5m다. 건물지는 3곳에서 발견됐다. 건물지에서 수습된 기와조각은 고려시대 것으로 확인된다. 산성을 답사하려면 하루일정으로는 불가능하다.

삼국시대 때 포천일대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에 쫓기던 궁예의 전설이 무성한 곳이기도 하다. 궁예는 보개산성에서 부하들에게 "나의 신통력으로 산성을 쌓을 테니 보고만 있으라"고 하면서 산에서 싸리나무를 꺾어 휘두르니 웅장한 산성이 한순간에 쌓였다고 한다. 또한 918년 6월, 왕건세력이 일으킨 정변에 궁궐을 빠져나온 궁예와 부하들은 이 산성으로 피신해 격전을 벌였으나 왕건에게 적수가 되지 못해 명성산성으로 탈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치성의 흔적인 석축

보개산성은 지금까지 문헌과 지리지에서 산성과 관련된 내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산성이 위치한 장소와 축조방법, 그리고 큰 규모의 산성형태를 볼 때 고려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다. 지난 1995년 육군박물관에서 지표조사가 있었지만, 정확한 역사시기를 밝힐 수 있는 것은 발굴조사뿐이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보개산성은 한탄강 댐이 완공되면 수몰지역에 속해있다. 어쩌면 버려질지도 모른다. 한때는 지금 남북한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연평도처럼 전운이 감도는 군사요충지였을 것이다.[데일리안 = 최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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