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학교 출신 감독이 표현한 재일동포의 복잡한 역사, 한국 관객 울렸다… BTS 덕질하는 디테일부터 신예 항나·카사마츠 쇼의 시너지까지
재일동포 3세 손명아 감독에게 영화 ‘트로피’는 피하고 싶었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자신이 조선학교 출신이고, 어머니 역시 조선학교 교사였기에 누구보다 잘 아는 세계였지만, 그래서 더 쉽게 마주할 수 없는 소재였다. 그는 “처음에는 쓰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스스로 상처를 안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손명아 감독 ⓒ엣나인필름
제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에서 상영된 ‘트로피’는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 학생 소희(항나 분)의 성장담이다. 조선학교에 다니는 소희는 무용대회를 준비하고 친구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속한 세계와 바깥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영화는 조선학교, 조선무용, 재일동포의 역사를 다루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감정은 보편적이다. 설렘, 창피함, 분노, 미안함, 그리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소희의 얼굴 위에 차곡차곡 쌓인다.
손 감독은 이 이야기를 ‘분노’에서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어린 시절 그는 학교 일에만 바빴던 어머니를 보며 가족보다 학교가 더 중요한지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쓰며 실제 조선학교 교사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의 시선은 넓어졌다.
“처음에는 한 가정을 힘들게 했던 조선학교가 원망스러웠어요. 그런데 취재를 하면서 그 불만과 분노가 부모님 탓도, 학교만의 탓도,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나 일본 사회만의 탓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됐죠. 동서 냉전 대립의 역사적 폐해가 쌓이고 쌓여 우리 가정에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이 과정을 거치며 시나리오 역시 큰 변화를 맞이했다. 주인공 소희의 성장만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감독 자신도 함께 성장한 셈이다.
손명아 감독 ⓒ엣나인필름
극 중 인물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받쳐주는 디테일들도 흥미롭다. 특히 눈에 띄는 장치는 케이팝(K-POP)이다. 소희는 방탄소년단(BTS)을 좋아하는 소녀로 그려지는데, 팬 문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영화 속 ‘덕질’ 대화가 꽤 구체적이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손 감독은 웃으며 “사실 저는 ‘여돌’(여자 아이돌)을 좋아한다. 뉴진스(NewJeans)의 정말 큰 팬”이라고 고백했다. 이어 “방탄소년단 관련 디테일은 조감독 중에 아미(ARMY, 방탄소년단 팬덤명)가 있어서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소희를 연기한 항나는 손 감독에게 볼수록 매력있는 배우였다. 주인공이 전반적으로 극을 끌어가기에 관객이 계속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번 영화를 통해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디딘 신인이지만 그렇기에 내추럴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찍을 때, 항나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대사를 읊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마시거나 다른 일상적인 행동을 섞어가며 연기하더라고요. 그런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를 잘 살려줬죠”
한국 관객에게도 친숙한 일본 배우 카사마츠 쇼의 출연 역시 눈길을 끈다. 영화에서 조선학교 선생님 역을 맡은 그를 두고 손 감독은 “카사마츠 쇼가 한국 무대인사에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체사하는 영상을 보고 캐스팅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어 “처음에는 비중이 작은 역할이었지만 카사마츠 배우의 출연이 결정된 뒤 그의 존재감 덕분에 후반부에 중요한 감정 씬이 추가되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손명아 감독 ⓒ엣나인필름
지난 3일 국내 최초 상영 직후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객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국 관객들이 남긴 울림은 손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본 관객들은 조용히 감정을 속으로 삼키는 편인데 한국 관객들은 웃을 포인트에서 크게 웃어주시는 등 반응이 생생하게 표출되더라고요. 덕분에 지브이(GV, 관객과의 대화) 때 객석으로 나가면서 큰 힘을 얻었고 따뜻한 분위기 덕에 한국어도 더 자연스럽게 튀어나왔어요”
다만 손 감독은 한국 관객들이 영화 속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전부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트로피’는 불친절하리만큼 역사적 맥락을 주입하지 않는 영화다. 해방 이후 일본 사회 안에서 차별받으면서도 한국으로 쉽게 돌아오지 못했던 재일동포들의 복잡한 역사와 조총련의 학교 지원 계기 등 이념적인 거대 서사는 소희의 일상 뒤편으로 물러나 있다.
손 감독은 거창한 설명 대신, 일본이라는 제3국에서 조선학교에 다니며 혼란을 겪는 소희의 얼굴을 끈질기게 따라가는 방법을 택했다. 자신이 속한 폐쇄적인 세계를 때론 창피해하고 원망하면서도 끝내 그 세계를 온전히 이해해가는 과정이 영화의 진짜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제목이자 인정의 상징인 ‘트로피’는 단순한 성과를 넘어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를 뜻한다. 손 감독이 한국 관객들에게 가장 바라는 점도 이와 맞닿아 있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동일하게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에는 관객들에게 기묘한 인상을 남길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용에 몰입하고 다시 화면 속에서 그 모습을 마주할 때는 그 시선이 조금은 따뜻하게 달라져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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