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지진 아픔 딛고 우뚝 선 고베항, ‘친수’에서 길을 찾다

장정욱 기자 (cju@dailian.co.kr)

입력 2026.06.02 11:08  수정 2026.06.02 11:11

세계 4위 물류 중심지였던 고베항

대지진 이후 물류항 위상 상실

‘워터프런트’ 통해 친수 공간 재탄생

부산항 재개발 사업에 남기는 교훈

고베항 전경. ⓒ데일리안 장정욱 기자

일본 고베항은 효고현 고베시에 있다. 일본 항만법에서 국제 전략 항만으로 지정된 곳이다. 1868년 1월 1일 개항해 지금까지 일본 주요 국제 무역항, 3대 여객 항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고베항은 1980년대까지 뉴욕항, 로테르담항, 홍콩항에 이은 세계 4위 규모의 동북아시아 물류 중심지였다. 기존 항만으로는 물동량을 감당하지 못해 1960년대부터 인공섬인 ‘포트 아일랜드’와 ‘로코 아일랜드’를 매립해 항만 기능을 옮겼다.


고베항은 아픈 과거를 품은 항만이다. 고베항은 지난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을 겪었다. 이른바 ‘고베 대지진’이다.


규모 7 이상 강진으로 당시 시설 대부분이 파괴됐다. 항구 기능 자체를 상실했다. 고베항이 역할을 잃으면서 부산항이 반사이익을 얻기도 했다.


지난달 29일 찾은 고베항은 지진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대지진 흔적을 담아둔 ‘메모리얼 파크’가 아니었다면 그날의 기억은 상상으로만 남았을 터다.


고베항 첫인상은 ‘깨끗함’과 ‘시원함’이었다. 컨테이너 화물이 잔뜩 쌓여있을 거란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일본 ‘3대 물류항’이란 느낌은 전혀 없었다.


세키구치 나오키 고베시 항만국 진흥과 계장 설명에 따르면 고베항은 선박 대형화와 화물 컨테이너화에 따라 물류항과 친수 공간을 구분했다고 한다.


실제 고베항 메리켄 파크 어디에서도 컨테이너는 찾기 어려웠다. 지역 명물인 포트 타워(고베 타워)와 박물관(고베해양박물관), 대관람차, 복합쇼핑몰 ‘모자이크’까지 모든 시설은 고베항을 ‘항만’이 아닌 거대한 공원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른바 ‘고베 워터프런트 그랜드 디자인(Kobe Waterfront Grand Design)’ 사업이다.


해당 사업은 항만 중심 도시였던 고베를 국제적인 해양문화·관광도시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대규모 도시재생 프로젝트다. 고베항이 물류 기능을 넘어 문화·관광·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한 복합 수변공간으로 가꾸는 내용이다.


고베시가 제시한 워터프런트 그랜드 디자인의 비전은 바다와 산, 하늘을 활용한 새로운 가치 창출이다. 바다와 산이 가까이 공존하는 고베만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해 세계적인 관광·문화 거점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통해 관광객 유치는 물론 국제회의와 전시회, 공연 산업, 스타트업 육성 등 다양한 도시 기능을 집적해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고베항 전경. ⓒ고베시

사업의 중심축은 신코 부두 일대다. 이 지역에는 대형 공연장과 상업시설, 호텔, 레스토랑, 마리나 등을 집적해 복합 유원지를 조성 중이다. 특히 최근 조성한 ‘TOTTEI(토테이)’ 구역은 워터프런트 개발의 상징적 공간이다. 이곳에는 약 1만 명 규모 아레나와 해안공원, 상업시설, 전망형 녹지공간 등이 들어서 공연과 여가, 관광을 결합한 새로운 해양문화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베 상징인 포트타워와 메리켄파크 일대도 대대적인 재정비가 이뤄졌다. 2024년 재개장한 고베 포트타워는 옥상 전망대와 360도 파노라마 전망 공간, 카페와 전시시설 등을 갖추며 단순 전망시설에서 체험형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메리켄파크 역시 수변 산책로와 문화공간을 확대해 시민과 관광객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편되고 있다.


건축물 중심 아닌 ‘사람·공간·자연’


고베 워터프런트 그랜드 디자인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한 관광 개발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고베시는 이 사업을 통해 국제회의와 전시산업(MICE), 공연·콘서트 산업, 해양문화 콘텐츠, 친환경 도시 조성, 디지털 전환 등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항만 재생을 도시 경쟁력 강화와 미래 성장동력 확보 전략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기타가와 겐슈케 고베시 항만국 부서장은 “항만시설은 (대지진 피해를) 2년 만에 복구했으나, 열악한 지방재정 탓에 지역을 재생하는 데는 오래 걸렸다”며 “2012년 빚을 다 갚고 현재 보는 바와 같이 재생공간을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베항 개발은 부산 북항 재개발과 비교된다. 두 사업 모두 노후 항만을 시민 친화적 공간으로 재생하고 해양관광을 활성화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고베는 문화·관광·엔터테인먼트 기능을 중심으로 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고베항 야경. ⓒ클립아크코리아

반면,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은 낡은 항만을 신항으로 이전하고 기능을 잃은 북항 일대를 국제적인 해양 관광 거점이자 비즈니스 중심지로 바꾸는 내용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대규모 항만 재개발 사업으로 관심이 높다.


중구 중앙동에서 동구 초량동 일원(약 155만㎡)을 대상으로 하는 1단계 사업은 시민을 위한 친수공간과 문화 복합 거점 조성을 골자로 한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과 크루즈 터미널이 들어선 복합항만지구를 비롯해 오페라하우스가 들어설 해양문화지구, IT·영상·전시지구 등이다.


동구 범일동과 좌천동 일원(약 228만㎡)으로 이어지는 2단계 사업은 글로벌 비즈니스 중심지와 원도심 연계 발전에 초점을 맞춘다.


자성대부두 이전 완료에 따라 철도시설 재배치와 연계한 신해양산업 육성 기반을 마련했다. 오는 2028년 착공해 2030년 이후 기반시설 완료를 목표로 추진 중이다.


부산항이 고베항 개발에서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구조(건축물) 중심에서 내용(콘텐츠)과 문화 중심으로 변모한다는 점이다.


고베항은 거대한 빌딩을 짓기보다 아레나나 수족관처럼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문화 앵커를 정교하게 배치했다. 북항 역시 오페라하우스나 대표 상징물(랜드마크) 부지에 세계적인 수준의 문화·체험 내용을 어떻게 채워 지속 가능하게 운영할지 고민해야 한다.


다음으로 철저한 경관 관리와 보행자 중심 설계다. 고베항은 바다를 가로막는 무분별한 고층 개발을 제한해 도심 어디서나 바다가 보이도록 설계했다.


북항 2단계 사업에서는 건축물의 통경축(시각적으로 트인 공간)을 확보하고, 부산역과 원도심에서 바다까지 끊임없이 걸어갈 수 있는 ‘보행 연속성’ 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원도심과의 유기적인 연계도 중요하다. 고베는 난킨마치(차이나타운)나 옛 거류지 같은 기존 도심 상권과 수변 공간(워터프런트)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북항 2단계의 핵심 성공 여부도 낡은 원도심 주민들이 북항의 시설을 함께 누리고, 북항의 활력이 원도심 상권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키구치 나오키 고베시 항만국 진흥계장은 “고베의 미래상은 산과 바다, 하늘, 역사를 살리는 계획. 아늑하고 걷고 싶어지는 공간, 바다를 바라보며 자연을 느끼는 풍경, 고베를 상징하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야경, 산관학에 의한 마을 만들기”라고 설명했다.




고베항 전경. ⓒ고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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