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우승 스타일 그대로…“생산량보다 헤리티지”
리슬링·진판델 소량 생산 유지…장기 숙성 철학 강조
1973년 우승 샤도네이 한국 경매 추진…수익금 기부 검토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 블라인드 시음회 현장 모습. 당시 프랑스 와인 전문가들은 미국 나파밸리 와인에 최고 점수를 부여하며 세계 와인사의 흐름을 바꾸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샤토 몬텔레나
1976년 프랑스 파리. 세계 최고 와인을 가리는 블라인드 시음회에서 프랑스 최고급 와인들이 줄줄이 이름을 올릴 것이라 확신했던 11명의 심사위원들은 예상 밖 결과를 받아들게 된다. 우승 와인 이름은 보르도도, 부르고뉴도 아닌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한 무명 와인이었다.
이 실화는 훗날 영화 ‘와인 미라클(원제 보틀 쇼크·Bottle Shock)’로도 제작됐다. 영화는 당시 ‘와인 변방’ 취급을 받던 미국 와인이 프랑스 중심의 세계 와인 질서를 뒤흔드는 과정을 그렸다. 업계에서는 오늘날까지 이 사건을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이라고 부른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 와인은 수백 년 전통과 권위를 가진 ‘절대 기준’에 가까웠다. 뛰어난 와인은 오직 프랑스에서만 나온다는 인식이 업계 전반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프랑스는 오랜 시간 축적된 떼루아와 기후, 명문 샤토 전통을 바탕으로 세계 와인 시장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이변’을 만든 건 프랑스 명문 샤토가 아니었다. 미국 나파밸리의 작은 와이너리 ‘샤토 몬텔레나’였다. 1882년 설립된 이 와이너리는 미국 금주령 이후 한동안 폐허처럼 방치됐지만, 1972년 배럿 가문이 인수한 뒤 불과 4년 만에 ‘파리의 심판’ 우승 와인을 배출하며 세계 와인사의 흐름을 바꿨다.
그리고 ‘파리의 심판’이 50주년을 맞은 올해. 그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샤토 몬텔레나의 오너 ‘보 배럿(Bo Barrett)’은 한국을 찾아 와이너리의 역사와 철학, 대표 와인을 직접 소개하는 자리를 가졌다. 보 배럿은 이날 일정을 끝으로 공식 석상에는 더 이상 나서지 않을 예정이다.
보 배럿 샤토 몬텔레나 오너가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WSA와인아카데미에서 열린 미디어 시음회에서 ‘파리의 심판’ 50주년과 와이너리 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세계L&B
“우리는 1976년 ‘파리의 심판’에서 우승했던 방식 그대로 와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트렌드에 맞춰 변하기보다 클래식한 스타일과 헤리티지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샤토 몬텔레나의 오너 ‘보 배럿’은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신반포로에 위치한 ‘WSA와인아카데미’에서 열린 샤토 몬텔리나 미디어 초청 시음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당시 우승 이후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지만 생산량 확대 대신 품질 유지에 집중했다”며 “현대적인 유행을 좇는 와이너리가 아닌 가족 경영 체제 안에서 오랜 철학과 스타일을 이어가는 패밀리 와이너리로 지금도 소량 생산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1976년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우승했다면, 지금은 토양과 미생물, 양조 기술 등에 대한 연구가 축적돼 우리가 어떤 와인을 만드는지 명확히 이해하게 됐다”며 “기술은 발전했지만 50년 전 철학을 유지하며 장기 숙성형 와인을 중심으로 생산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샤토 몬텔레나의 대표 와인 6종이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WSA와인아카데미에서 열린 미디어 시음회에 전시돼 있다. 이날 행사에서는 ‘파리의 심판’ 우승 스타일을 계승한 샤도네이 2023 빈티지를 비롯해 리슬링·진판델·카베르네 소비뇽 등이 소개됐다. ⓒ신세계L&B
◇ “수익성보다 철학”…소량 생산 고수한 몬텔레나의 진판델·리슬링
그는 이날 1976년 ‘파리의 심판’ 우승 와인으로 유명한 ▲샤도네이 2023 빈티지를 포함해, ▲포터밸리 리슬링 2024 ▲에스테이트 칼리스토가 진판델 2023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2022 ▲에스테이트 카베르네 소비뇽 2023 등 샤토 몬텔레나의 대표 와인 6종을 직접 소개했다.
보 배럿은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의 차이를 예술 작품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화이트 와인은 수채화와 같아서 무엇을 덧붙일수록 원래의 섬세함과 투명함이 흐려질 수 있다”며 “반대로 레드 와인은 조각 작품처럼 구조와 질감을 쌓아가는 작업에 가깝다”고 소개했다.
특히 그는 몬텔레나의 대표 레드 와인인 샤토 몬텔레나 에스테이트 칼리스토가 진판델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일반적인 캘리포니아 진판델이 강한 과실향과 높은 당도, 묵직한 스타일에 집중한다면 샤토 몬텔레나의 진판델은 보다 절제되고 우아한 스타일을 지향한다.
진판델은 포도 숙성 편차가 큰 품종이라 재배와 선별 과정이 중요하다. 샤토 몬텔레나는 완전히 균일하게 익은 포도만 선별해 사용한다. 그 결과 지나치게 잼처럼 무겁지 않으면서도 균형감과 우아함을 갖춘 스타일이 구현되며 장기 숙성이 가능한 프리미엄 와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 배럿은 이날 기자를 향해 “가장 몬텔레나다운 와인”이라며 “만약 평생 단 하나의 와인만 마셔야 한다면 샤토 몬텔레나의 진판델을 선택할 만큼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는 것은 물론 가장 편안하면서도 복합적인 매력을 가진 와인”이라고 말했다.
리슬링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보 배럿은 샤토 몬텔레나의 리슬링에 대해 “독일 모젤이나 알자스 스타일처럼 강한 산도 중심이 아니라, 잘 익은 과실감과 복합성을 강조한 오스트리아 스타일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와이너리 특유의 양조 방식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샤토 몬텔레나는 리슬링 생산 과정에서 젖산 발효를 최소화해 과실 향과 산도를 최대한 살리는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반적으로 젖산 발효는 와인의 산미를 부드럽게 만들고 버터 같은 풍미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샤토 몬텔레나는 리슬링 특유의 긴장감과 복합적인 아로마를 유지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다.
눈에 띄는 점은 진판델과 리슬링 두 와인 모두 연간 생산량도 약 1000케이스 수준에 불과하다. 대부분 와이너리 고객 중심으로 판매되며 한국에만 소량만 유통된다. 1케이스는 약 12병 기준으로, 신세계L&B는 지난해 6월부터 진판델 2000병, 리슬링 1500병을 국내에 들여오고 있다.
보 배럿은 “리슬링과 진판델은 대량 판매를 위한 와인이 아니라 가족과 가까운 고객들이 오랫동안 즐기기 위해 만들어온 와인”이라며 “수익성보다 와이너리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철학을 유지하는 데 더 의미를 두고 있다”고 미소 지었다.
1976년 ‘파리의 심판’ 당시 샤토 몬텔레나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시음하고 있는 보 배럿(오른쪽)과 아버지 짐 배럿(Jim Barrett)의 모습. 샤토 몬텔레나는 이 대회에서 프랑스 와인을 제치고 우승하며 세계 와인사에 이름을 남겼다. ⓒ샤토 몬텔레나
◇ “50년 뒤에도 우아해야 한다”…논알코올 트렌드에도 자신감
그는 이날 장기 숙성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도 드러냈다. 장기 숙성이 가능한 와인은 산도와 타닌, 당도, 알코올 구조 등이 균형 있게 갖춰져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향과 질감이 더 복합적으로 변화하고, 맛이 무너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구조가 약한 와인은 오래 둘수록 과실향이 빠지고 산화가 진행되며 맛의 균형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수십 년이 지나도 풍미와 균형감을 유지하는 와인을 ‘숙성 잠재력(ageability)’이 높은 와인으로 평가한다.
그는 “최근 1972년 빈티지 샤도네이를 직접 오픈했는데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생동감과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었다”며 “50년 전 와인이 지금도 훌륭하다면 현재 만드는 와인들은 앞으로 50년, 100년 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와 더불어 “많은 와이너리가 ‘오래 숙성 가능한 와인’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40~50년 뒤에도 우아함과 균형감을 유지하는 와인은 많지 않다”며 “샤토 몬텔레나는 50년 전 와인이 지금도 훌륭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이를 증명해냈다고 생각한다”고 자부했다.
최근 글로벌 주류 시장에서 논알코올 트렌드가 확산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우려하지 않았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건강 관리와 절제된 음주 문화가 확산되면서 논알코올·저도주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프리미엄 와인 시장은 상대적으로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이날 “좋은 음식과 좋은 와인을 찾는 소비자는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며 “와인 한 병을 만드는 데 기본적으로 긴 시간과 수많은 결정, 기술이 들어가는데 결국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다시 훌륭한 와인을 찾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샤토 몬텔레나는 단순히 와인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하나의 장소와 역사, 가족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와이너리”라며 “우리가 지키고 싶은 것은 생산량이 아니라 헤리티지”라고 강조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 위치한 샤토 몬텔리나 포도밭 전경. 샤토 몬텔레나는 자체 포도밭 중심의 재배 방식과 지속가능한 와인 생산 철학을 바탕으로 ‘파리의 심판’ 이후 지금까지 헤리티지를 이어오고 있다. ⓒ샤토 몬텔레나
◇ 태양광·자선 경매까지…헤리티지 넘어 지속가능성으로
환경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철학도 강조했다. 샤토 몬텔레나는 2007년부터 태양광 패널을 도입해 와이너리 운영 에너지 상당 부분을 태양광 기반으로 전환했으며, 지속가능한 방식의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을 이어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포도 재배 과정에서도 세밀한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포도밭 캐노피의 각도와 햇빛 노출량을 조절해 포도가 과도하게 익지 않도록 관리하고, 필요 시에는 물을 분사해 포도 온도를 낮추는 방식도 활용하고 있다.
보 배럿은 “좋은 와인은 결국 좋은 토양과 건강한 포도밭에서 나온다”며 “샤토 몬텔레나는 오랫동안 자연환경과 토양을 보존하는 방식에 집중해왔다”고 자신했다.
실제 와이너리 내 포도밭 대부분은 직접 재배·관리하는 에스테이트 방식(자체 재배 방식)으로 운영되며, 생산량 확대보다 품질 유지와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이날 보 배럿은 수출 국가를 선정할 때 단순 판매 규모보다 현지 시장의 와인 문화와 소비자 이해도를 중요하게 본다고 설명했다.
그는 “샤토 몬텔레나는 대량 유통 브랜드가 아닌 만큼 브랜드 철학과 스타일을 이해하는 시장에 더 집중하고 있다”며 “한국은 와인에 대한 이해도와 관심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시장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이어 “단순히 판매량이 많은 국가보다 장기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함께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파트너가 중요하다”며 “한국 소비자들은 음식과 와인의 조화, 숙성 가능성 같은 부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 샤토 몬텔레나와 잘 맞는 시장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그는 ‘파리의 심판’ 우승 와인과 관련한 사회공헌 계획도 공개했다. 보 배럿은 당시 우승을 차지했던 1973년 빈티지 샤도네이가 현재 와이너리에 단 10병만 남아 있다고 소개하며, 이 가운데 1병을 한국에서 경매 형식으로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매 수익금은 사회공헌 활동에 활용될 예정이다. 샤토 몬텔레나 측은 형평성과 취약계층 지원, 전통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중심으로 기부 방향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1973년 빈티지 샤도네이의 가치는 현재 환율 기준 약 4000만원 이상으로 평가된다.
보 배럿은 “1973년 샤도네이는 미국 와인 역사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와인”이라며 “현재 한 병은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돼 있을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 그런 이 와인을 5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소개하고 싶었다”고 웃어보였다.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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