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못했을 때 비로소 희망이 된다”…나홍진 감독이 말하는 ‘호프’ [칸 리포트]

데일리안(프랑스, 칸) =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5.19 07:41  수정 2026.05.19 07:43

'호프' 제79회 칸 영화제 경쟁 진출작

나홍진 감독은 데뷔작 ‘추격자’(2008년 미드나잇 스크리닝)를 시작으로 ‘황해’(2011년 주목할 만한 시선), ‘곡성’(2016년 비경쟁 부문)에 이어 신작 ‘호프’까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렸다. 이로써 그는 한국 감독 최초로 ‘장편 연출작 전편 칸 초청’이라는 기록을 쓰게 됐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비무장지대 인근 호포항을 배경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출현과 이에 맞서는 이들의 사투를 그린 ‘호프’는 지난 17일(현지시간)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전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화려한 복귀식을 치른 이튿날인 18일, 프랑스 칸의 호텔 바리에르 레 마제스틱 칸에서 나홍진 감독을 만났다. 10년 만에 전 세계 취재진 앞에 선 나 감독은 거창한 소회 대신, 긴 공백기 동안 겪었던 현실적인 고충과 떨리는 심경을 솔직하게 꺼내놓았다.


“팬데믹이 있었고, 시나리오를 쓰고 나서는 ‘이건 좀 어렵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다 혼자 할 수 있는 작업들을 하면서 시간이 흘렀고, 잠잠해졌다 싶어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일이 너무 많더라고요. ‘이렇게 일 많은 영화가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도, 질문에 답변하는 것도 여러 가지 면에서 다 낯설습니다. 다 까먹었습니다.”


전 세계 영화인들 앞에서 최초 공개라는 큰 행사를 치렀지만, 나홍진 감독의 머릿속은 여전히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다.


“처음 공개하고 나서는 만족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아쉬운 부분들이 먼저 보였습니다. ‘이런 부분은 아쉽구나’, ‘더 해야겠구나’ 싶었습니다. 미진한 부분들이 아직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서울에서는 계속 후반 작업 중입니다. 이런 부분, 저런 부분 계속 회의하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앞서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는 이 작품을 두고 “장르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지금까지 한 번도 이야기된 적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을 펼쳐낸다는 평을 남겼다. 실제로 ‘호프’는 어느 한 장르로만 규정하기 힘든 복합적인 성격을 띤다.


“스릴러라고 하면 스릴러일 수 있고, 액션이라고 하면 액션일 수 있습니다. 사실 장르라는 건 구분하기 편하려고 있는 의미 아닌가 싶습니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나홍진 감독은 DMZ를 역사적 상징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외부와 단절되고 고립된 공간이라는 감각 자체에 더 끌렸다고 했다. 가장 작고 초라한 장소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오히려 우주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상상에서 출발했다는 설명이다.


“이 영화는 공간이 중요한 영화였어요. DMZ라는 공간 자체가 역사적으로 굉장히 상징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저는 DMZ의 역사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접근했다기보다는, 과거에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었던 마을, 출입 금지된 공간 정도의 이미지로 생각했어요. 우주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가장 작고, 가장 초라하고, 가장 낮은 곳 같은 공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온 우주로 확장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그 공간에 설정하게 됐고요. 고립되고 낙후된 느낌 같은 것들도 중요했습니다.”


가장 낮고 낙후된 공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마침내 ‘호프’라는 역설적인 제목으로 귀결된다. 결코 쉽게 이룰 수 없기에 역설적으로 품게 되는 인물들의 열망, 그리고 작품의 주 무대인 ‘호포항’이라는 공간 이름 속에 숨겨진 중의적인 뜻이다.


“제목도 그런 맥락이에요. 이 사람들이 각자 입장에서 처음에는 없던 바람들이 생깁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결국 각자 바라는 바를 가지고 있죠. 사실 우리 사회 속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런 희망 하나씩은 갖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이루기가 굉장히 어렵잖아요. 만약 결론을 내고 다 이뤄진다면 희망이라는 의미 자체가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다다르지 못했을 때 비로소 희망이 되는 거니까요. 그런 상황들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제목이 ‘희망’보다는 ‘호프’가 낫지 않을까 싶었어요. 또 호랑이가 출발한 포구라는 의미도 있어서 공간 이름을 ‘호포항’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계 생명체를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크리처 디자인은 처음엔 기존 할리우드 업체에 의뢰했어요. 그런데 이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서 영국의 한 섬에 사시는 디자이너분을 찾아냈고, 그분께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작업이 더 이상 확장이 안 되는 느낌이 있었어요. 좋은 아이디어는 얻었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기가 어려웠던 거죠. 그래서 미국 디자인 회사 패럴랙스에 의뢰하게 됐습니다. 스티븐 장이라는 한국계 대표가 있는 회사인데, 그분들과 같이 힘을 합쳐 마무리했습니다.”


“처음에는 크리처를 어떤 타이밍에, 어떤 방식으로 등장시켜야 할지가 가장 어려웠어요. 그런 세팅을 해놓은 이상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니까요. 저 역시 ‘어떻게 등장시키는 게 가장 이상적일까’를 계속 고민했습니다. 계속 바꿨어요. 그러다가 로케이션 헌팅을 하고 공간들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구나’ 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처음엔 여기였다가 저기였다가 계속 반복하다가 프리 프로덕션 단계쯤에서야 명확하게 정리가 됐고요.”


할리우드 스타 부부인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 그리고 테일러 러셀의 ‘호프’ 합류는 그 자체로 큰 화제다. 특히 이들이 맡은 역할이 얼굴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외계인 캐릭터라는 점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비무장지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낯선 한국 영화 프로젝트를 세계적인 배우들이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연출자인 나홍진 감독에게도 여전히 신기한 경험이다.


“알리시아 비칸데르나 마이클 패스벤더를 비롯해 모든 배우분들이 굉장히 흔쾌히 승낙해주셨어요. 솔직히 그게 놀라웠습니다. 마이클은 줌 미팅하다가 그냥 ‘그럼 하겠다’고 하셨고, 알리시아도 비슷했어요. 그분들은 상황에 따라, 또 작품에 따라 선택하시는 분들이에요. ‘이런 거 해보고 싶었다’, ‘굉장히 재밌겠다’고 하시면서 흔쾌히 해주셨습니다. 마이클 패스벤더는 굉장히 어른스러운 분이셨어요. 오히려 먼저 조언을 해주시거나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저한테 잔소리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웃음) 책 읽듯이 리딩하면서 ‘이걸 영어로 이렇게 번역하면 어떡하냐’고 하시더라고요. 특히 외계어 관련해서 되게 재미있게 잔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의외의 얼굴을 보여준 배우는 조인성이다. 기존의 세련되고 도시적인 이미지를 벗고 거칠고 생활감 짙은 성기를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나홍진 감독이 실제 조인성에게서 발견한 예상 밖의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


“조인성 씨는 작품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얼굴들을 계속 보여주는 배우예요. 류승완 감독님의 ‘밀수’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변에서 조인성씨 칭찬을 정말 많이 하시더라고요. 하나같이 다 긍정적인 이야기뿐이었어요. 실제로 만나보니까 제가 알고 있던 도시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보다 훨씬 더 소탈하고 털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잘됐다’ 싶었어요.”


작품의 배경이 시골 마을인 만큼, 동네 주민으로 깜짝 등장하는 반가운 얼굴들은 극의 활력을 책임지는 치트키다.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주는 베테랑 임현식과 박영규의 존재감은 관객들에게 색다른 재미와 반가움을 선사한다.


“임현식 선생님이나 박영규 선생님은 설정 자체가 동네 노인분들이 많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사실 이분들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너무 좋겠다’ 싶었고, 모시는 데도 큰 어려움은 없었고요.”


방대한 서사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심어둔 복선들 탓에 벌써부터 속편의 여부가 주목 받고 있다.


“긴 서사를 한 편의 영화 안에 담으려고 하다 보니까, 관객들이 짐작할 수 있는 여지들이 자연스럽게 들어갔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이후 이어질 이야기들이 이미 지금 영화 안에 명확하게 잠겨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마무리했어요. 저는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끝나자마자 속편 질문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3부작이라는 말이 돌고 있는데 공식적인 이야기를 드린 적은 없습니다. 3부작이 될 수도 있고, 2부작이 될 수도 있어요. 어떤 분들은 파트1, 파트2처럼 알고 계시는데 사실 콘티가 너무 두꺼워서 나눠서 작업했는데, 거기서 나온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호프'의 강렬한 외형이나 우주적 세계관과 달리, 이야기를 관통하는 내면의 정서는 의외로 따뜻하다. 서사의 갈등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절대적인 악인을 지워낸 자리에,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인물들의 입장을 채워 넣은 덕분이다.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중 하나는 어느 사건에도 절대적인 안타고니스트는 없다는 점이에요. 안타고니스트가 없다 보니까 오히려 스트레스가 확 줄었습니다. 누군가를 특별하게 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없었던 거죠. 사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고, 누구에게나 다 의미가 있는 인물들이잖아요. 서로 다른 입장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한테는 굉장히 착한 영화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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