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 복수극 지고 다시 ‘범인 찾기’ 붐…‘허수아비’ 흥행 비결 [D:방송 뷰]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입력 2026.05.09 01:11  수정 2026.05.09 01:11

범인추리 유도하며 자발적 바이럴 확산에 ENA 월화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

악인을 정해두고 응징하는 ‘사이다’ 복수극이 장르물의 주류로 자리 잡았던 흐름 속에서, 범인의 정체를 끝까지 감추는 정통 추리극이 다시 시청자의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ENA ‘허수아비’ 제작발표회 ⓒKT스튜디오지니

7일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5일 방송된 ENA ‘허수아비’ 6회는 전국 7.4%, 수도권 7.7%를 기록했다. 이는 방송사의 월화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이다. 지난달 20일 첫 방송된 ‘허수아비’는 2회 만에 시청률 4.1%를 기록한 데 이어 매회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허수아비’는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범죄 수사 스릴러다. 1988년부터 2019년까지 30여 년의 시간을 오가며, 과거의 연쇄살인 사건과 현재 다시 시작된 의문의 사건을 연결한다. 작품은 실화의 뼈대를 가져오되 세부 설정은 극적으로 각색했다. 이춘재 사건 당시 실제 허수아비는 범인을 겁주고 범행을 막기 위한 경고의 상징이었다.


반면 드라마는 이 허수아비를 범죄의 핵심 이미지로 뒤집는다. 범인이 허수아비처럼 서 있다가 홀로 지나가는 여성을 노리는 설정은, 실화 속 오브제를 단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전체의 공포와 미스터리를 끌고 가는 장치로 확장한다. 시청자에게 익숙한 실제 사건을 가져왔지만, 그 안에서 다시 낯선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흥행의 핵심도 이 지점에 있다. ‘허수아비’는 실화 모티브 작품이지만, 시청자가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의 결말에 기대지 않는다. 특정 인물이 범인처럼 보이면 곧바로 다른 인물이 의심스럽게 부각되고, 한 인물의 알리바이가 흔들리면 또 다른 인물의 과거가 새 단서처럼 제시된다. 시청자는 매회 등장인물의 표정, 대사, 침묵, 회상 장면까지 단서로 해석하며 진범을 추론한다.


이는 최근 장르물의 흥행 공식과는 다른 흐름이다. 그동안 범죄 장르물은 ‘범인이 누구인가’보다 ‘악인을 어떻게 처단하는가’에 무게를 둔 경우가 많았다. SBS ‘모범택시’는 매회 다른 사건과 악인을 제시한 뒤 통쾌한 응징으로 마무리하는 에피소드형 복수극의 재미를 내세웠고, 같은 방송사의 ‘열혈사제’는 부패한 권력과 범죄 세력을 향한 응징의 쾌감을 초점을 뒀다. 디즈니+ ‘비질란테’와 SBS ‘국민사형투표’ 역시 범죄자를 향한 사적 제재와 처벌의 윤리를 중심에 놓았다. 이들 작품이 이미 드러난 악인을 향한 분노와 응징의 쾌감을 키웠다면, ‘허수아비’는 마지막까지 범인의 정체를 감추며 시청자를 추리의 과정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런 방식은 빠른 몰입과 즉각적인 해소감을 준다. 하지만 인물들이 한 회 또는 몇 회 안에서 소비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 시청자가 장기간 인물의 심리와 관계를 따라가며 의심을 쌓아가는 재미와는 거리가 있다. 반면 ‘허수아비’는 공통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의심의 방향을 계속 바꾼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누가 기억을 숨기는지, 누가 과거 사건과 더 깊게 연결돼 있는지를 오래 끌고 가며 시청자의 심리를 흔든다.


이 과정에서 배우들의 연기도 추리 구조를 강화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박해수, 이희준, 곽선영, 송건희 등 주조연 배우들은 인물의 감정을 과하게 설명하기보다 의심과 불안을 남기는 방식으로 극의 긴장감을 높인다. 인물의 말보다 표정과 태도, 순간적인 반응이 더 큰 단서처럼 읽히면서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화면 안의 세부를 들여다보게 된다.


‘허수아비’ 스틸컷 ⓒKT스튜디오지니

방송사 역시 이 같은 ‘참여형 추리’가 흥행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ENA 관계자는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와 탄탄한 캐릭터 설정, 촘촘한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초반부터 강한 몰입감을 형성한 점이 ‘허수아비’의 주요 성공 요인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범인 추리 요소를 중심으로 시청자들이 직접 추리에 참여하는 형태의 시청 경험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면서, 자발적인 바이럴이 확산돼 화제성 급상승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며 “이를 바탕으로 4060 중심의 TV 시청층은 물론, 2030 젊은 시청층까지 함께 유입되며 세대를 아우르는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고 전했다.


‘허수아비’의 선전은 정통 범죄 수사물에 대한 수요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2023년 JTBC ‘힙하게’가 연쇄살인범 찾기 구조를 활용해 추리의 재미를 살린 바 있지만, 해당 작품은 사이코메트리 능력과 코믹 설정을 전면에 내세운 코믹 수사극에 가까웠다. ‘허수아비’처럼 실화 모티브의 무게감을 바탕으로 범죄 수사물의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범인 추리를 흥행 동력으로 삼은 사례는 한동안 드물었다.


특히 ‘허수아비’는 범인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조연 한 명까지 의심스럽게 배치한다. 뚜렷한 악인을 세워두고 그를 응징하는 구조가 아니라, 모든 인물이 조금씩 수상해 보이는 상황을 만든다. 시청자는 주인공의 수사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조차 놓친 단서를 찾으려 한다. 이처럼 드라마 바깥에서 추리가 이어지는 구조는 방송 이후에도 작품의 화제성을 유지하는 힘이 된다.


장르물 팬덤의 공백을 일부 메운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올해 방영이 예정된 ‘시그널2’는 오랜 기간 기대작으로 꼽혀왔지만, 주연 배우 조진웅의 사생활 이슈 이후 방영 여부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진 상태다. 장기 미제 사건, 과거와 현재의 연결, 집요한 수사와 진실 추적이라는 요소를 기다려온 시청자들에게 ‘허수아비’는 그 갈증을 일부 해소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허수아비’의 흥행은 장르물 소비 방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자극적인 복수와 즉각적인 응징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이 다시 정교한 단서와 심리전, 범인 추리의 재미에 반응하고 있다. 때려 부수는 액션보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긴장감이 힘을 얻은 것이다.


이는 채널의 한계도 넘어서는 사례다. 지상파나 대형 플랫폼이 아니더라도, 촘촘한 이야기와 배우들의 연기, 시청자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추리 구조가 결합하면 전국적인 화제성을 만들 수 있다. ‘허수아비’는 복수의 쾌감이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범인을 맞히는 재미’가 드라마 시장의 흥행 키워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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