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담, 전주가 사랑한 배우의 진솔한 기록
전주는 그에게 낯선 도시가 아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용돈을 모아 찾던 곳이자, 어머니가 나고 자란 곳. 그리고 이제는 배우 정하담의 이름으로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식 무대에 서는 자리로 이어졌다.
ⓒ고스트 스튜디오
'들꽃'(2015), '스틸플라워'(2015), '재꽃'(2016) 박석영 감독 3부작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은 그는, '밀정'(2016), '헤어질 결심'(2022),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2024) 등 스크린을 넘나들며 존재감을 쌓아왔다. 드라마 '스위트홈'(2020), '피라미드 게임'(2024), '굿파트너'(2024)까지, 매 작품 강렬한 변신을 거듭해온 그런 그가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의 대미를 장식한다. 설렘과 책임감이 교차하는 무대다.
“이렇게 큰 영화제에서 폐막식 사회를 맡게 돼 정말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해요. 영화제를 마무리하는 자리인 만큼 누가 되지 않도록 끝까지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큽니다. 특히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셨어요. 제가 그동안 GV나 영화제에 자주 참여하긴 했지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식 사회를 맡는다고 하니 꼭 보러 오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머니가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라신 분이라 지금도 외가 친척들이 모두 전주에 계시거든요. 그래서 더 의미있고 기뻐요.”
정하담은 마중클래스를 통해 관객과 함께 보는 작품으로 '재꽃'(2016)을 선정했다. 그가 수많은 출연작 중 이 영화를 가장 먼저 떠올린 배경에는 배우로서의 10년이라는 시간과 유년 시절 전주라는 도시가 주었던 특별한 기억이 맞닿아 있었다.
“‘재꽃’을 처음 떠올린 건 이 작품이 제게 10년 전의 시간을 그대로 담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에요. 2016년쯤 촬영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의 제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하고요. 저는 전주와 멀지 않은 시골에서 자랐어요. 학창 시절 제게 전주는 친구들과 함께 쇼핑도 하고, 돈을 모아 놀러가는 곳이었죠. ‘재꽃’은 성인이 된 이후에 찍은 작품이지만, 전주국제영화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기억들이 겹쳐지면서 이 영화와 연결돼 떠오르더라고요. 다른 작품을 고민하기도 했어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선보였던 작품들 중에서는 작년에 상영된 ‘엔진의 심폐소생’과, 약 10년 전 전주에서 촬영했던 단편 ‘플라이’, 여기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된 ‘새벽’까지, 세 편의 단편을 묶는 방식도 고려한 끝에 ‘재꽃’으로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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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담은 이번 특별 상영을 통해 관객은 물론, 10년 전의 자신과도 재회하고자 했다. 개봉 이후 좀처럼 극장에서 만날 수 없었던 ‘재꽃’은 그에게도 여전히 그리운 이름이었다.
“‘재꽃’은 제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소중한 작품이에요. 그래서 이 영화가 관객분들께도 조금이나마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 큽니다. 개봉 이후에는 거의 다시 보지 못했고, 특히 극장에서 볼 기회는 없었거든요. 이번 특별 상영을 계기로 저 역시 꼭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덧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카메라 앞에 서 왔지만, 정하담은 여전히 익숙함과 낯설음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소통의 기술은 능숙해졌을지언정, 새로운 인물을 마주하는 배우의 본질적인 두려움만큼은 처음과 다름없는 무게로 그를 붙들었다. 세월이 흐르며 단단해진 겉모습 속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연기를 향한 치열하고도 겸손한 고민의 흔적이 보였다.
“배우로서 달라진 점이라면 인터뷰나 GV 같은 자리에 훨씬 익숙해졌다는 부분이에요. 처음에는 긴장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고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느라 어려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훨씬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반대로 여전히 변하지 않은 지점도 있어요. ‘재꽃’을 할 당시에도 연기에 대한 걱정이 커서 많이 기도하고 스스로를 다잡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불안감은 지금도 비슷하게 남아 있습니다.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기 전, 특히 첫 촬영을 앞두고는 ‘잘할 수 있을까’, ‘이 선택이 맞을까’ 하는 고민이 계속 따라와요. 현장에 익숙해지면 괜찮아지지만, 매번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는 과정이다 보니 시작 전에는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배우에게도 때로는 영화를 향한 애정을 새롭게 수혈해 줄 운명적인 작품이 찾아오곤 한다. 정하담에게는 최근 관람한 영화 '시라트'가 그러했다. 온몸으로 영화를 받아내며 느꼈던 전율은 그를 극장에 머물게 했고, 스스로를 위한 작은 영화제를 열게 만들었다.
“‘시라트’를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었고, 몸이 굳은 듯 멈춰서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상영이 끝난 뒤에도 여운이 강하게 남아서 몸이 떨리는 느낌까지 들었고요. 그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바로 다음 상영, 다다음 상영까지 이어서 보게 됐어요. 이 영화를 통해 오랜만에 ‘영화를 본다’는 감각을 다시 깨달았고,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세 편을 연달아 보며 저만의 작은 영화제처럼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꼭 추천드리고 싶은 작품입니다.”
수많은 영화제를 경험해 온 정하담이지만, 그중에서도 전주는 가장 '즐겁게 놀 수 있는' 최고의 장소로 손꼽힌다. 화려하고 분주한 여타 영화제들과 달리, 한 공간 안에서 복닥복닥하게 어우러지는 전주만의 응집력은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특별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전주국제영화제는 규모가 큰 영화제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복닥복닥’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영화인들이 이곳저곳에 자연스럽게 모여 있고, 그 안에서 함께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이 크거든요. 개인적으로도 가장 편하게, 또 가장 즐기면서 머물 수 있는 영화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주는 객사 일대에서 모든 일정이 이어지다 보니 한 공간 안에서 밀도 있게 머물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정하담에게 영화제는 작업의 연장선이자 동시대 영화인들과 호흡을 나누며 살아있는 감각을 확인하는 자리다. 그는 이번 영화제를 통해 세대의 변화를 체감하며, 비슷한 고민을 나누는 또래 감독들과의 협업에서 얻는 즐거움을 고백했다.
“영화제는 배우로서 중요한 동력이 되는 자리예요. 작품을 찍고 나면 자연스럽게 영화제에 가고 싶다는 목표가 생기고요. 평소에는 배우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흐릿해질 때도 있는데, 영화제에 오면 동시대 감독과 배우들을 만나고 같은 공간에서 교류하면서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다시 또렷해지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또래, 90년대생 감독님들과 작업하는 경험이 많아진 게 큰 변화로 느껴져요.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는 동년배 감독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독립영화를 하면서 점점 저와 비슷한 세대의 감독들과 협업하게 됐거든요. 앞으로는 더 어린 세대의 감독들과도 만나게 될 텐데, 그런 흐름 자체가 배우로서 계속 새로운 자극이 됩니다.”
그는 영화제 안에서 관객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크린 속의 세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영화관 밖에서 나누는 맛있는 음식과 다정한 대화였다. 전주를 찾는 이들이 영화제만의 특별한 공기를 온전히 만끽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가 아껴둔 오래된 단골집의 풍경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영화제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으니까 다양한 영화를 많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전주에 오신 만큼 맛있는 음식도 충분히 즐기셨으면 하고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곳은 새벽강이라는 술집인데, 오래된 공간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서 영화제 기간에 종종 찾게 되는 곳이에요. 소박하게 모임을 갖기에도 잘 어울리는 장소죠.”
지난 10년의 시간을 묵직하게 채워온 정하담의 시선은 이제 더 넓고 낯선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현실의 밀도 높은 감정을 길어 올리던 그가 새롭게 꿈꾸는 무대는 인간의 상상력이 극대화된 가상의 공간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재정의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배우로서 마주할 다음 장에 대한 설렘이 느껴졌다.
“디스토피아나 멸망을 다루는 세계관, 혹은 판타지처럼 상상력이 많이 필요한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아직 해보지 않은 영역이기도 하고, 시각적으로도 보는 재미가 큰 작업이 될 것 같거든요. 의상이나 설정까지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연기하는 경험이 흥미로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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