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름’의 시대를 관통하는, 장단의 파동…‘스피드’가 증명한 현대적 호흡 [D:헬로스테이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5.04 11:01  수정 2026.05.07 09:19

오늘날의 속도는 물리적 단위를 넘어 하나의 강박이자 생존의 문법으로 작용한다. 참음과 기다림의 미덕이 희미해진 ‘빠름의 시대’에서,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으로 대변되던 한국 춤이 동시대의 가속도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는 단순한 기술적 변주를 넘어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서울시무용단

서울시무용단의 ‘스피드’(Speed)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전통 장단의 호흡을 현대적인 감각의 속도로 바꿔내면서 ‘한국 춤은 고요하고 정적이다’라는 박제된 편견에 도발적으로 도전장을 내민다. 한국 춤 고유의 선을 살리면서도 그 기저에 흐르는 에너지를 동시대의 언어로 풀어내면서, 전통의 현대화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보여준다.


지난 5월 1일부터 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오른 ‘스피드’는 2025년 초연의 성공을 바탕으로 무대 연출과 구성을 한층 더 키웠다. 이번 공연은 전작 ‘일무’(One Dance)가 보여준 국제적 성과 이후 서울시무용단이 선보인 핵심 레퍼토리로, 한국 춤의 외연을 미디어아트와 전자음악의 영역으로 본격적으로 밀어붙였다. 특히 이번 재연은 M씨어터의 구조를 십분 활용해, 초연 당시의 물리적 구조물을 걷어내고 디지털 연출을 통해 공간 전체를 거대한 장구의 울림통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작품의 구조는 일반적인 완급 조절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윤혜정 예술감독은 한국 춤의 정적인 이미지를 깨기 위해 아예 속도를 결정하는 ‘장단’을 전면에 내세웠다. 공연은 프롤로그부터 빠른 속도로 포문을 열어 관객의 감각을 즉각적으로 자극한다. 장단의 빠르기에 따라 박과 엇박자, 그리고 극한의 가속으로 치닫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6개의 장면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며 ‘속도의 대서사시’를 완성한다.


특히 극적인 정점에 도달한 뒤 찾아오는 정적의 구간은 앞선 속도감을 반전시키며 깊은 잔상을 남기고, 에필로그에 이르러 다시 원래의 속도로 회귀하는 구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속도라는 화두를 다각도에서 체험하게 만든다.


ⓒ서울시무용단

이번 공연의 가장 큰 미학적 변화는 작품 중반부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초연 당시 강력한 LED 빛을 활용해 ‘파괴’의 이미지를 전달했던 이 구간은, 이번 재연에서 유연하고 감성적인 ‘파도’의 이미지로 탈바꿈했다. 이는 강렬한 시각적 충격보다는 한국 춤 특유의 부드러움 속에 숨겨진 강인한 에너지를 포착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번 공연의 백미는 무대 위 아티스트들이 실시간으로 교감하는 즉흥 구간이다. 타악 연주자 황민왕과 음악가 해미 클레멘세비츠(Hamé Klemensiewicz)가 구축한 사운드스케이프는 전통 타악의 강렬한 타격감과 전자음악의 세련된 공간감을 교차시키며 무대 위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라이브로 연주되는 장단에 맞춰 노연택, 김민지가 선보이는 즉흥적인 움직임은 소리와 몸짓이 하나로 묶이는 생동감의 정수를 보여준다.


여기에 뉴미디어 아티스트 이석의 영상은 무용수의 실시간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기술이 단순한 배경이 아닌 춤의 연장선으로 기능하게 만든다. 무용수가 회전하거나 도약할 때, 바닥의 빔프로젝션 영상은 그 궤적을 실시간으로 추적해 빛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역동적인 춤선을 보여준 노연택과 김민지의 발끝에서 시작된 물결은 무대 후면 스크린까지 치솟는다. 관객은 거대한 장구 울림통 내부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파동이 된 무용수의 신체를 통해 공간 전체로 퍼져 나가는 장단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마주하게 된다.


‘스피드’가 초연부터 극찬을 받은 이유는, 단순히 한국 춤의 ‘세련된 변신’만을 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쉼 없이 몰아치는 현대의 가속도 속에서, 우리 고유의 호흡인 ‘장단’이 얼마나 유연하고 강력하게 중심을 잡을 수 있는지, 또 동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에 가치가 있다. 전통은 박제된 유산이 아닌 살아있는 오늘의 언어임을 증명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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