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을 깔아준 어른들, 故 전유성·김민기가 남긴 유산 [초점]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09.30 14:07  수정 2025.09.30 14:56

지난 9월 25일, ‘코미디계의 대부’ 전유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는 앞서 지난해 7월 타계한 ‘연극계의 거목’ 김민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코미디와 연극, 전혀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매우 닮았다. 이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정점에 올랐음에도 스스로 주연이 되기보다 후배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판’을 까는 데 평생을 바쳤다.


ⓒ뉴시스, 학전

두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은 ‘개척’이다. 이들은 기존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길을 냈다. 전유성은 슬랩스틱 코미디가 주류이던 1980년대, 지적 유머와 시사 풍자를 결합한 코미디를 시도했다. 미국에서 익살을 뜻하는 영어 단어 ‘개그(gag)’와 남자를 뜻하는 ‘맨(man)’을 합친 것으로, 이 때문에 국내에서는 ‘개그맨 창시자’ ‘대한민국 1호 개그맨’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전유성은 KBS의 간판 개그 프로그램이었던 ‘개그콘서트’의 기틀을 마련하며 한국 코미디의 패러다임을 바꿨고, ‘코미디 시장’이라는 코미디 극단을 운영하며 안상태, 김대범, 황현희, 박휘순, 신봉선, 김민경 등의 후배 개그맨들을 다수 발굴했다.


많은 아이디어로 개그맨들의 코미디에 조언해주고, 코너의 틀까지 잡아주며 후배들을 이끌어줬다. 자기 집에 있던 골동품까지 팔면서 코미디를 하고 싶다고 모여든 지망생들을 양성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예원예술대, 한국예술종합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김신영, 조세호 등을 제자로 길러내기도 했다.


김민기의 ‘학전’ 역시 문화계의 새로운 해방구였다. ‘아침이슬’의 작곡가로 1970년대 포크 음악의 상징이 된 그는, 1991년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열었다. 이곳은 상업주의 논리에 잠식되던 대학로에서 뚝심 있게 예술의 가치를 지켜낸 공간이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4000회 이상 공연되며 한국 뮤지컬의 역사를 새로 썼고, ‘학전’은 수많은 신인 배우와 음악인의 등용문이 되었다.


정형화된 틀을 깨는 그들의 시도는 자연스레 그들이 남긴 가장 빛나는 유산, 즉 ‘사람’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후배들이 마음껏 실패하고 실험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 즉 ‘극장’을 만드는 데 헌신했다. 전유성은 서울 중심가를 떠나 경북 청도에 ‘코미디 철가방극장’을 세웠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은 청도에서 내가 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철가방극장이나 축제로 한 푼도 챙긴 적이 없다”면서 “코미디 지망생 양성을 위해 사비를 들여 운영했고 연금보험까지 해약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전유성이 후배들에게 창의성의 방향을 제시했다면, 김민기는 묵묵히 버티며 터전을 지켰다. 그는 스스로를 ‘앞것’이 아닌 ‘뒷것’이라 칭하며 무대 뒤에서 후배들을 빛내는 역할을 자처했다. 33년간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학전’을 지켜낸 것은 수많은 예술가에게는 빚과도 같은 헌신이었다. 그렇게 뒤를 지켰던 스승의 존재가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배우 황정민의 기억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황정민은 ‘학전 어게인 콘서트’ 당시 “학전은 제게 배우로서 포석이자 지금의 저를 만든 마음의 고향”이라며 “김민기 선생님에게 기본이 뭔지를 다시 배웠고, 그것이 나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고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후배들을 위해 묵묵히 자리를 지킨 두 사람의 삶은, 상업적 성공과 자기 과시가 미덕이 된 시대에 진정한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전유성은 방송가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뒤로하고 변방에서 새로운 웃음의 씨앗을 뿌렸고, 김민기는 시대에 저항했던 청년 시절의 명성을 뒤로하고 대학로의 작은 극장을 지키는 ‘지킴이’로 남은 생을 보냈다. 이들은 스스로를 내세우기보다 후배들이 성장할 토양을 다지고, 그들이 열매 맺는 것을 보는 데서 기쁨을 찾았다. 단기적인 성과나 이익이 아닌, 사람을 키우고 다음 세대를 위한 무대를 남기는 ‘연대와 헌신’의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했다.


스승은 떠났지만, 그들이 만든 극장과 그 무대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그들의 정신을 이야기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다음 세대를 위해 ‘판’을 깔아주는 어른, 자기 자신의 영광보다 타인의 성장을 돕는 리더십이 절실한 지금, 두 거인이 남긴 유산은 우리 사회에 깊고 묵직한 울림을 던진다.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