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러 전승절 연대 과시에도 '대화' 기조 고수
공정·정의 담론서 '평화'로 확장…샌델과 재회
국내 극한 대치 국면 속 '평화·통합' 아젠다 부각
이재명 대통령이 세계적 석학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를 접견하고 '평화배당(peace dividend)'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꺼내 들었다. 평화를 비용이 아닌 현실적 이익으로 규정하며, 남북 대화와 신뢰 회복을 통해 국민 모두가 그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18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샌델 교수를 만나 "정의로운 사회, 최근에 말한 '평화 배당' 이런 개념들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아주 각별한 느낌을 주고 있다"고 밝혔다.
평화배당은 전쟁이나 군비 경쟁이 완화되면서 군사비 지출을 줄이고, 그로 인해 절약된 자원을 복지와 교육·경제 투자 등으로 돌려 평화 상태가 주는 재정적 이익을 사회가 나눠 갖자는 발상을 뜻한다.
이 대통령은 "'평화배당'이라고 하는 그런 개념도 아주 나에게 재미있게 다가왔다"며 "미국도 그런 평화배당을 얻게 됐지만, 대한민국도 어쨌든 평화 체제가 구축이 돼 국민 모두가 평화배당을 얻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평화라고 하는 게 비용과 손실이 아니라 현실적 이익이라는 점도 많이 알려지면 좋겠다"고 했다.
이에 샌델 교수는 "대통령께서 평화배당에 대해 말해줬는데, 이 평화배당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경제·민주적인 배당으로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한반도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대한민국뿐 아니라 주변 많은 국가들의 양극화 등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민주주의에 나아가는 그런 도움이 될지 않을까 싶다"고 화답했다.
샌델 교수의 화답에 이 대통령은 "(센델) 교수 같은 아주 영향력 있는 분들이 '평화가 바로 현실적 이익일 수 있다, 정의가 현실적 이익일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 정말로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제 한반도 포럼' 축사를 통해서도 궤를 같이 하는 메시지를 냈다. 이 대통령은 임웅순 국가안보실 2차장이 대독한 축사를 통해 "대립과 적대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신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만들어진다"면서 "정부는 군사적 긴장 완화와 남북 간 신뢰 회복을 위한 조치를 출범 초기부터 취했고, 앞으로도 이러한 입장은 일관되게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 "변화된 남북 관계와 국제 정세 상황을 반영해 평화 공존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겠다"며 "상대방의 즉각적인 호응이 없다고 낙담하거나 멈추지 않겠다. 한반도 평화 정착은 대한민국의 번영과 국민의 일상을 지키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은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나와 주목된다. 불과 보름 전 중국의 제2차 세계대전 승전 80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에 북한과 중국, 러시아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반(反)서방 연대'를 과시한 바 있다.
지난 3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앞에서 진행된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톈안먼 망루(성루)에 등장했고, 국제사회에는 이것을 사실상의 '신(新)냉전'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다음 달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석할 가능성을 일축하기도 했다. 위성락 실장은 전날 한국신문방송편집인 간담회에서 'APEC을 계기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보느냐'는 질의가 나오자 "만남의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없다"며 이같이 답했다. 북·중·러의 밀착이 강화되는 가운데, 남북 대화 재개는 오히려 더 멀어졌다는 것이 현실적인 기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이 '평화배당'을 꺼낸 것은 한국 정부가 여전히 평화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국내외에 각인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평화가 비용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구상은 당장 구현되기 어려운 데다 한국의 군사비 축소, 북한의 대화재개 의지 등이 맞물려야만 가능하다. 현재 북·중·러 밀착과 미·중 패권 갈등에서는 가시적인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국내 정국이 검찰과 사법 이슈, 극심한 여야 대치로 첨예하게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발언이 나온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평화'란 용어를 강조함으로서 갈등 정치에서 벗어나 국정 아젠다를 평화·통합으로 돌리는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관측이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평화배당'과 관련한 질의에 "대통령의 언어가 아니라 샌델 교수의 책에 나오는 개념"이라며 "'평화는 이익이 되고 수혜가 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정치인이 하면 오히려 세속적으로 볼 수 있지만 (센델 교수와 같은) 학자가 이런 개념을 많이 (언급) 하면 도움이 되고, 실제로 대통령께서는 평화라는 것이 이념적 이익 뿐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실제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단 말씀을 주고 받으셨다"고 부연했다.
한편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공정하다는 착각' 등의 저서를 통해 널리 알려지며 '공정 ' 담론을 촉발한 세계적 석학이다. 이날 만남은 이 대통령이 샌델 교수로부터 급변하는 세계 정세, 극단적 대치가 이어지고 있는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한 조언을 듣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샌델 교수는 서울에서 열린 국제 한반도 포럼 기조연설을 위해 방한했다.
앞서 이 대통령은 샌델 교수와 화상으로 대담을 나눈 바 있다. 이번 재회는 이 대통령이 2021년 말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시절에 가졌던 대담 이후 약 4년 만이다. 당시 두 사람은 능력주의가 갖는 구조적 한계와 불평등 심화 위험성에 공감했으며, 보다 실질적인 공정 사회를 어떻게 구현할 지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이번 만남에서는 '평화배당'이라는 새로운 화두가 등장하면서, 대북문제가 단순한 외교·안보 의제를 넘어 국민 생활과 직결되는 현실적 이익으로 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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