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比 배치 타이폰·네메시스 미사일 시스템 지원 담당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급속히 증강하는 中 해군력 견제
比, 탄약 허브 자주 국방 건설에 도움돼 환영하는 분위기
比 어업단체들, 충돌 시 中 표적 우려…中 반발도 거셀듯
미국이 남중국해와 접하고 있는 필리핀 서부 수비크(Subic)만에 세계 최대 규모의 ‘탄약 제조·저장 허브(거점)’를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빠른 속도로 해군력을 증강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미군의 중거리 지대지 미사일 시스템 ‘타이폰’(Typhon)과 원격 조종 지대함 미사일 체계인 ‘네메시스’(NMESIS)를 배치한 미국이 이를 지원할 대규모 탄약 제조·저장 시설의 조성에 나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남중국해를 포함한 인도·태평양 해역에 대한 패권적 움직임에 맞서수비크만에 ‘탄약 제조·생산 허브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지난 8일 보도했다. 수비크만 탄약 허브 계획은 ‘대양 해군’을 추구하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해군력을 억지하고 견제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대양 해군은 연근해는 물론 대양에서도 국가이익을 수호하고 국가정책을 지원할 수 있는 작전능력을 갖춘 해군을 뜻한다. 요미우리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7월 22일 미 워싱턴DC 백악관을 방문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탄약 허브 건설 계획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탄약 허브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몇 달 안에 (필리핀은) 그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탄약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며 “빠른 미사일과 느린 미사일, 정확한 미사일, 정확도가 약간 떨어지는 미사일이 모두 포함된다”고 말했다. 이에 마르코스 대통령은 “이 시설은 필리핀 ‘자주 국방’을 지원하고 ‘서(西)필리핀해’(남중국해) 상황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라고 화답했다.
미국과 필리핀은 앞서 3월 수비크만에 탄약 허브를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곧이어 6월 미 하원이 “인도·태평양 지역에 ‘전진 배치된 탄약 제조 시설’이 없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2026 수비크만 기지 건설 타당성 평가’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강한 탄력이 붙었다.
보고서는 “인도·태평양 지역에 전선 탄약 제조 시설이 없는 것이 우려된다”며 미 국방부 등에 실현 가능성 조사를 요구했다. 탄약 허브에서는 “탄약의 공동 생산과 필요한 관련 자재의 보관” 계획이 들어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수비크만 탄약 제조 시설에선 니트로셀룰로오스와 니트로글리세린 등 폭발물과 탄약 제조 필수 재료를 생산하게 된다.
필리핀 루손섬 서쪽 연안에 있는 수비크만은 수도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90㎞가량 떨어져 있다.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圳), 대만 타이베이(臺北)와는 1100㎞쯤 떨어진 거리다. 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대만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특히 F-16 전투기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전략 요충지다.
중국 상하이(上海)·베이징(北京)과는 각각 1800㎞, 2800㎞가량 떨어져 있다. 수비크만에는 미 해군도 인정한 선박수리 조선소와 상선·군함 정비시설, 대형 드라이독(Dry Dock·해안에 배가 출입할 수 있도록 땅을 파서 만든 구조물)이 들어서 있다. 이 가운데 ‘수비크만 드라이독’은 미 해군 표준을 충족하는 시설로 인증돼 있다. 중국의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 사거리 내에 대규모 핵심 군사 거점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필리핀은 2023년 미국이 필리핀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지를 기존 5곳에서 9곳으로 늘리고, 지난해부터 미군의 ‘타이폰’과 ‘네메시스’ 배치를 허용한 상황이다. 이런 만큼 대규모 탄약시설이 구축될 경우 유사시 미국과 필리핀의 신속한 합동 대응이 가능해진다. 그동안의 ‘순회 훈련’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대중(對中) 요새가 필리핀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 덕분에 필리핀은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싼 중국과의 팽팽한 긴장관계에서 강한 억지력을 보유하게 된다. 특히 2022년 출범한 마르코스 주니어 정권은 미국과 밀착하며 대중 강경노선을 걷고 있어 역내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2016년 출범한 전임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부는 친중(親中) 노선을 채택해 중국과 갈등 완화를 시도했지만, 분쟁은 지속돼 왔다. 필리핀은 2012년 ‘남중국해’ 명칭을 ‘서필리핀해’라고 자체 변경했다.
수비크만은 특히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중국해의 스카버러 암초(Scarborough Shoal·중국명 黃巖島)와 인접해 있고 해군 함정 운영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있어 중국 견제에도 유리하다. 더욱이 미국과는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지닌 곳이다. 식민통치로 미국과 첫 인연을 맺은 수비크만은 2차 대전 당시 인근의 클라크 공군기지와 함께 미국의 핵심 군사기지 역할을 해냈다. 1970년대 베트남전 당시 병참지원을 담당하는 보급기지 역할을 담당했고, 냉전시대에도 여전히 높은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부터 필리핀 전역에 민족주의 바람이 확산하면서 반미시위가 격화되자 여론을 의식한 필리핀 상원은 기지 임대협정 연장안을 부결시켰다. 이로써 1992년 11월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미국 함정의 출항을 끝으로 미군과 수비크만과의 질긴 인연이 단절됐다. 이후 ‘경제특구’로 지정돼 현재는 HD현대중공업 등이 조선소를 운영하고 있다. 미군 철수 후 중국은 ‘힘의 공백’을 틈타 호시탐탐 남중국해 패권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부지역에서 이슬람 반군과 사실상 내전을 치르던 필리핀 정부는 1999년 미국과 군사교류협정을 맺어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이 재개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미군의 수비크만 사용을 허용했다. 이후 미군과 필리핀군의 합동군사훈련은 정례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수비크만 탄약 허브 건설과 관련해 방위산업의 발전과 고용증가도 기대한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방위장비품의 국산화와 방위산업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자립 방위체제 법안’에 서명했다. 이번 탄약 허브 건설도 이 법의 대처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길베르토 테오도로 필리핀 국방장관도 “약 200~300명의 고도의 기술자가 고용돼 전자 기기와 같은 고도의 공업제품의 제조를 지원해 주는 산업인 이른바 ‘지원산업’(supporting industry)도 발전하게 된다”며 강조했다.
하지만 필리핀 국내에서는 수비크만 탄약 허브가 실제로 건설됐을 경우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환경보호단체 등은 지난달 “수비크만이 무기와 전쟁을 위한 폐쇄 구역이 된다”고 비판했다. 어업단체들도 “중국과의 충돌 시 합법적인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성명을 내놓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필리핀 야권과 시민단체는 “수비크만 기지 건설은 미국의 침략 야욕에 휘둘리는 꼭두각시 짓”이라며 “필리핀이 중국의 총알받이가 될 수 있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딸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은 “필리핀은 자국의 국가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며 “외국이 강요하는 의제는 거부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단일 외국 세력(미국)과 지나치게 밀착하면 주권을 훼손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필리핀국제인권연대(ICHRP)는 “살상무기를 제조하는 미 군산 복합체에 저항해야 한다”며 “이 계획은 필리핀이 아니라 미국의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 측의 반발도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된다. 필리핀에서는 4월 미국·필리핀 양국 군의 합동 군사연습에 맞춰 지난해부터 ‘타이폰‘과 ‘네메시스’가 배치됐다. 미국은 필리핀 북부 바탄섬에 네메시스를 실전 배치했다. 바탄섬은 대만 남단에서 남쪽으로 200㎞가량 떨어져 있다.
네메시스가 정조준하는 대상은 대만과 바탄섬 사이 바시해협 오가는 군함들이다. 바시해협은 남중국해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전략 요충지이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거나 봉쇄를 시도할 때 반드시 통제해야 하는 곳이다. 중국은 이 미국의 미사일 시스템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필리핀은 이와 함께 수비크만 등 주요 전략 거점에 해군기지를 구축할 계획에 관해 언급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5월27일 해군 창설 127주년 기념식에서 수비크만 입구에 위치한 그란데섬 내 나바산 해군기지에서 착공식이 조만간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필리핀 정부는 그란데섬을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방안까지 추진하며, 군사적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그란데섬에서는 올해 3월 낚시꾼을 가장해 미·필리핀 해군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중국인 6명과 필리핀인 1명이 스파이 활동 혐의로 구속됐다. 탄약 제조·저장 허브가 건설이 본격화되면 당연히 이런 활동의 증가할 것으로 보이며, 긴장이 더욱 높아질 우려가 있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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