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계는 침체의 터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관객 수 회복은 더디고, 수백억 원이 투입된 대형 텐트폴 영화들이 잇따라 고배를 마신 데 이어,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는 한국 영화가 단 한 편도 진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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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투자 위축과 기획 불안이 장기화되는 가운데에서도, 공포 장르에서는 신예 감독들이 뜻밖의 반등을 만들어내고 있다. 2023년 유재선 감독이 '잠', 2024년 김민하 감독이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로 각각 장편 데뷔를 치르며 신선한 연출력과 장르 감각으로 관객을 놀라게 했고, 올해는 김수진 감독이 '노이즈'로 스크린을 두드린다.
유재선 감독의 '잠'은 겉보기엔 단순한 부부 공포극처럼 보이지만, 잠든 남편이 무의식적으로 벌이는 이상행동을 둘러싼 공포를 다루며 몽유병이라는 키워드에 신선한 상상력을 더한 작품이다. 행복했던 신혼부부에게 닥친 이상 증상과 그로 인한 불안은 점차 공포로 비화되며, 인간 내면의 무의식과 신뢰를 건드린다.
'잠'은 유재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임에도 제76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됐고, 황금 카메라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김민하 감독의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은 보다 대중적인 정서와 발칙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개교기념일 밤, 현실이 된 학교괴담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형적인 클리셰를 비틀고 패러디하며 공포 장르의 고전적 문법을 유쾌하게 변주했다.
기존 명작 호러를 뒤틀며 B급 감성과 10대 정서를 결합한 김민하 감독의 접근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실험으로도 주목받았다.
이 작품은 시체스영화제, 가오슝영화제, 자카르타 필름 위크, 룬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 해외 장르 영화제의 초청을 받았으며, 개봉 후 호응에 힘입어 제작사와 김 감독은 발 빠르게 후속작 '교생실습' 촬영에 돌입,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올해는 김수진 감독의 '노이즈'가 또 한 편의 인상적인 데뷔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단편 '선'으로 제66회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되며 가능성을 보여줬던 김 감독은, 첫 장편 '노이즈'로 시체스국제영화제를 비롯한 다수 해외 영화제의 러브콜을 받았고, 117개국에 선판매되는 성과를 거뒀다.
'노이즈'는 층간소음이라는 현실적 공포를 소재로, 실종된 여동생을 찾기 위한 주영(이선빈 분)의 시점을 따라가며 심리적 긴장을 극대화한다. 특히 발망치, 의자 끄는 소리, 문을 두드리는 소리 등 일상적인 소음이 스트레스와 공포로 다가오는 과정을 정교하게 설계된 음향 디자인으로 구현했다. 이에 영화는 시청각을 동시에 압박하는 밀도 높은 한 편의 공포영화로 탄상했다.
이들 작품은 모두 공포 장르가 지닌 유연성과 밀도를 최대한 끌어올리며 국내외에서 의미 있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공포는 전통적으로 적은 예산으로도 강한 몰입도를 확보할 수 있는 장르이자, 시대적 불안, 사회적 억압, 개인의 트라우마를 압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창구이기도 하다. 팬데믹 이후 한국 사회에 만연한 피로감과 불신, 고립의 정서를 날카롭게 건드리는 도구로 신예 감독들이 공포 장르를 선택하면서, 정체된 한국영화에 새로운 감각과 가능성을 불어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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