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무치 바자르에 그 아가씨들은 없었다

입력 2008.08.23 08:34  수정

<들찔레의 편지 234> 사람도 시간도 더 빠르게 변하는 도시로

바뀌어 버린 우루무치, 우루무치의 기억은 이번에도 실망스러웠다

실크로드, 사막을 건너 파미르고원 가는 길 ( I )

3년 만에 다시 우루무치를 찾았다.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가는 시간, 텅 비어있는 도시를 들어서는 느낌은 색다르다. 그러나 이 도시가 내게 주는 냄새나 풍경은 3년 전 서안으로부터 들어 왔던 더운 한낮의 기억을 그대로 되살려 놓았다. 생각해보면 당시 우루무치는 밍밍한 소금물과 같은 특색 없음과 지루함을 느끼게 했던 냄새를 풍겼다.

우루무치 시내로 들어가는 길

그것도 그럴 것이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뜻을 가진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경로에서 벗어나 있던 곳으로 7세기에 이르러 인근 정주(庭州) 땅에 북정도호부(北庭都護部)가 설치되기 까지는 작은 현에 불과했다. 18세기 청대(淸代)에 이르러 카슈가르 왕조를 복속시키고 회교도에 대한 탄압정책을 펴면서 이 지역을 신장성(新疆省)이라 이름 짓고 우루무치를 성도로 삼았다. 이때부터 이 도시는 실크로드 천산북로의 관문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실크로드 황금기의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곳이 없다. 다만 신장위구르자치구 박물관이 있어 이 지역에서 출토된 전체적인 유적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을 따름이다.

호텔에 들어서서 켠 TV에는 새벽임에도 온통 북경 올림픽에 관한 내용뿐이다. 마치 한낮의 타클라마칸 사막만큼 올림픽 소식이 뜨겁게 달구어져 있고 에어컨을 끄고는 잘 수 없는 여행 첫 날의 애매한 어지러움이 밤새 나를 뒤덮어 어수선한 밤을 보내고 말았다. 국제 시간으로는 한 시간의 시차, 실제적으로는 우리나라와 세 시간의 시차를 보이는 우루무치의 아침 일곱 시 반은 우리나라 시간으로 치면 새벽 네 시 반이다. 미음으로 아침식사를 때우고 나선 우루무치의 아침은 느릿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간간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나는 또 그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시작된 여행의 첫머리다. 인근 러시아 영사관에 너무 일찍 비자를 받으러 와서 열리지 않은 문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몇몇 위구르인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음으로서 이 도시뿐 아니라 다시 찾은 실크로드에 첫 인사를 한 셈이다.

우루무치 시내에서 가끔 보는 오래된 버스

수년 전 실크로드를 가보겠다는 마음을 가진 이유는 경주 가까이에 살면서 괘릉의 호석으로 서 있는 무인상이 서역인일 수 있다는 사실, 그 앞의 네 마리 사자상이 투르판의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진묘수(鎭墓獸)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 신라의 왕릉에서 발굴된 유리그릇이나 구슬 등의 연원이 페르시아의 것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 왔을 것이라는 점,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은 석굴암, 그리고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가 유목민의 피를 이어받은 우리민족의 연원에 대한 키(key)가 될 수 있다는 점 등을 알게 된 때문이다.

최종 목적지인 파미르 고원의 풍경 하나

또한 혜초스님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적 사실이 흥미를 넘어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고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따라 가는 훈자 같은 마을에 대한 막연한 동경, 고비, 타클라마칸과 같은 사막이 주는 이미지, 초등학교 때 봉우리가 평평한 산 하나를 그려놓고 세계의 지붕이라 설명하였던 파미르에 대한 기억들도 나를 매년 이곳으로 이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3년 전 서안에서 우루무치까지를 다녀간 후 다시 우루무치 이후의 길을 잡으며 방문하게 된 우루무치에 대해서는 남다른 기대가 있었다. 하나는 지난번 이곳에 와서 가보지 못한 천산천지(天山天池, 해발 1,980m)의 물가에 서서 눈 쌓인 보고타봉 혹은 박격달봉(博格達峰, 해발 5,445m)을 바라보며 우랄알타이계의 한 일원으로 삶을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호수에 비쳐보고 싶었다. 천산산맥에서 두 번째로 높은 이 산자락의 호수는 서왕모가 목욕을 하던 곳이며, 기원전 1000년 경, 이 호수를 찾은 주나라 목왕(穆王)이 서왕모로 부터 환대를 받고 연정을 느꼈던 곳이라는 전설이 남은 곳이다. 그러나 천산천지에 대한 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다. 보고타 혹은 박격달의 뜻은 놀랍게도 백두산과 같은 의미이고 그 산 속에 똑같이 천지라는 연못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연못을 우랄알타이계의 연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우루무치 바자르 인근의 회교사원 첨탑(미나렛)들

안타깝게도 이번 여행의 종착역이 될 파미르고원에 위치한 카라쿨 호수(Karakul Lake, 해발 3,600m)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보고자 계획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이번에도 천산천지를 가보지 못하게 되고 만다.

이런 허탈함과 실망스러움을 주는 우루무치에서 무엇이 나를 보상해 줄 수 있는가? 그 답은 너무도 명약관화하다. 오직 한 군데 신장위구르박물관을 찾아 누란(樓蘭, Lou-lan)의 3,800년 된 미라(mummy)나 니아(尼雅, Niya) 왕국, 단단윌릭((Dandan-uilik)의 유적들을 보며 전설처럼 아스라이 사라진 옛 왕국들에 대한 끝없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당나라 때의 고분에서 발굴된 만두

처음 이 박물관을 찾았던 3년 전에는 지금의 신관이 한창 공사 중이었고 뒤 켠 원래의 박물관은 큰 창고 같은 건물이었다. 방부제처리를 하지 않고도 새로 세상의 빛을 본 미라들은 인류에게 던진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마치 방치되듯 창고 같은 건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점심 식사 후 찾아간 박물관에는 표를 사서 입장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다행히 외국인인 우리는 차로 박물관 마당까지 가서 입장할 수 있었다. 새로 지은 박물관의 내부는 깔끔했고 로비 한가운데는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지리모형이 자리 잡고 있어 이 지역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하도록 배려해 놓았다. 1층에는 민속자료를 모은 전시관과 구석기부터 청나라까지의 유물을 시대별로 분류해 전시해 놓았고 2층에는 미라들을 주로 전시한 곳과 중국공산당의 태동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까지의 역사를 담은 근대관이 있다. 그러나 주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실크로드의 유적과 미라가 이 박물관의 특색 있는 볼거리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나라 때 만들어진 바지 천

3년 전 보다 체계적이고 다양한 유물의 전시는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예컨대 투르판의 아스타나(Astana) 고분에서 나온 당나라 때의 만두나 꽃모양의 디저트용 케이크는 그 형태가 완벽하다. 기원 전,후의 시기인 한나라 때 만들어진 무사의 얼굴이 그려진 바지의 직조기술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북위와 당나라 이후까지 시대별로 전시된 명주나 다른 실로 짠 천의 디자인은 지금 보아도 상당히 세련된 것들이며 만져보지 않아도 어떤 질감일 것이라는 것을 알 듯 하다. 반쯤 깨어진 보랏빛의 유리잔과 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당나라 시대의 목걸이나 장신구를 보면서 실크로드를 건너 페르시아로부터 들어온 문화의 유입이 우리나라까지 오는 과정을 보는 듯하여 한참을 머무르게 만들었다.

치에모 고분에서 발견된 아기 미라

천산천지를 가지 못하는 대신 나를 위로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죽어서 다시 산 미라들이다. 누란미녀로 명명된 최고 3,800년 전의 누란미라부터 2,800년 전의 것으로 추정하는 8-10개월 나이의 아기 미라는 이 박물관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미라다.

고대 이집트의 미라들이 방부처리를 한 것과 달리 이곳에서 발굴된 미라들은 방부처리를 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 방부처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형태의 미라들이 발굴 될 수 있었던 것에는 몇 가지 자연적인 환경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예컨대 모든 미라들은 천산산맥 남쪽의 타클라마칸 사막과 타림분지에서 발굴 되는데 이지역의 환경은 거의 비가 없고 토양이 건조해서 사체가 쉽게 썩을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다. 두 번째, 이 지역은 예전에 바다였던 땅이 융기한 곳으로 토양 속에 염분을 함유하고 있다. 이는 시신의 부패를 촉진하는 미생물들의 운동과 발달을 억제시킨다. 셋째, 미라들이 매장된 묘는 밀봉되어 있지 않았으며 깊게 파묻지도 않았다. 따라서 건조한 사막가운데서 시신은 빠르게 건조될 수 있었다. 넷째, 시신들의 몸은 양털 외투, 가죽바지가 두텁게 입혀져 있었고 다리 쪽은 펠트제품으로 감싸놓아 겨울동안 부는 바람과 먼지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다. 이런 미라들은 모두 겨울에 사망하여 매장 된 것들이다.

3,800년 전의 누란 미라, DNA검사에서 서양인임이 밝혀졌다

1985년 치에모(且末, Qiemo)의 자군루크(Zagunluke) 고분에서 발견된 아기 미라를 보면 마음이 아린다. 무엇 때문에 그 어린 나이에 죽어 사막 한가운데 묻혀 있다가 이제야 다시 세상으로 나왔는지, 작은 베개를 머리 밑에 받치고 저렇게 곱고 붉은 포에 싼 채 땅에 묻었을 그 어머니는 누구였는지, 그 어머니의 눈물은 언제까지 흘렀는지? 잠을 자는 모습의 아기는 평화롭다. 다시 살아난 아기 미라는 어쩌면 이곳 위구르 사람들의 안녕을 빌어주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세계 최고(最古)의 누란(樓蘭)미라는 45세 전후의 나이를 가진 서양 여성으로서 혈액형이 O형이라는 것과 몸속에서 4,000년이 지난 즈음에도 기생충이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건조한 기후 덕분에 보존상태가 뛰어나며 살포시 웃는 표정이어서 ´죽음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이 미라는 한 올 한 올의 머리카락, 선이 그대로 살아있는 손금과 주름들,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 한 얼굴 표정으로 우리를 전율케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3년 전 시장에서 만났던 착한 아가씨들

이번에 이곳 미라들에 대한 내용 중 새로 알게 된 지식은 아기 미라가 나온 치에모의 자군루크 고분에서 같이 발견된 60세 정도의 할머니 미라를 통해서였다. 이 할머니는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혼혈로 죽은 후 코를 기준으로 양 눈가와 볼에 대칭적으로 두 개의 무늬를 문신이 아닌 물감으로 채색해 놓았다. 머리는 네 갈래로 딴 모습인데 그 중 두 갈래는 가발이며, 손톱에는 헤나(Henna)로 치장을 한 모습이다. 모두 내세에서의 안녕과 관련 있는 종교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진지함으로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보면 무섭다기 보다는 신비롭다. 미라를 볼 때는 관념적인 시각보다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월을 뛰어 넘는 대화를 한다는 기준을 가지고 대한다면 서로 말하지 않고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박물관을 나섰다.

우루무치 시장 광장에 앉아있는 위구르족 할아버지들

우루무치에 대한 또 다른 바람 하나는 우루무치 바자르 입구에서 작은 액세서리 가게를 하던 위구르 아가씨들을 다시 만나 보고픈 것이다. 이곳도 문명의 바람이 불어 우리나라 대도시 못지않은 도시화가 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예쁘고 착한 모습에서 지난번 여행에서의 끝 이미지가 좋았다는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위구르인들의 생활양식들도 격변의 시기를 맞고 있으며 그들의 전통적인 가치들이 하나씩 무너진다는 느낌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그녀들이 보여준 친절하고 맑은 표정이 당시의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카슈가르에 이르고 카라쿨 호수를 다녀와 다시 우루무치 시장을 찾았을 때 그녀들은 거기에 없었다. 그 가게는 칼을 파는 가게로 변해 있었고 그녀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가보기를 원했던 천산천지와 만나기를 원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던 한낮 어지럼증 비슷한 더위를 느낄 즈음 바자르 인근 회교사원 그늘에 앉아있던 위그루족 노인네들의 깊은 눈매에서 애잔한 세월을 느꼈다. 3년 이란 시간동안 시장도 더 현대화되었고 사람도 시간도 더 빠르게 변하는 도시로 바뀌어 버린 우루무치, 우루무치의 기억은 이번에도 실망스러웠다.

신장위구르 지역에는 견과류가 유명하다

그 옛날 카라반(caravan)들이 사막을 건너느라 쇠잔해진 낙타의 등에 무거운 물건들을 싣고 이곳에 왔을 때도 천산천지의 신명께 안녕을 빌었을 것이고 눈에 익은 사람들과 어울려 교역을 하고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생해서 찾아온 이곳에서 모래에 묻혀버린 잃어버린 왕국들처럼 혹은 신기루처럼 있어야할 자리에 없는 사람들, 변해버린 환경의 도시는 낯설고 쓸쓸했을 것이다. 나 역시 목숨을 걸고 장사를 하러 온 것도 아니고 현장이나 혜초 스님처럼 종교적 힘에 기대어 구도자의 길을 걸으러 온 것도 아니지만 세상이 변하고 도시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며 기대감이 실망스러움으로 변하여 허탈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실크로드 개략도

그래도 길은 가야한다. 천산북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천산산맥 남쪽 기슭을 따라 천산중로 를 타고 쿠차(庫車) 가는 길에 들어서면 심심한 도시 우루무치에 대한 실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를 위안한다. 혜초스님이 지나갔던 길을 걸으며 타림분지 속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고 파미르고원의 카라쿨 호수에 다다르면 작년에 올랐던 ´피의 고개´ 쿤자랍패스 부터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와 나에게 한 해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하늘에 땅에 물에 살아 있음에 대한, 살아 있음으로서 행복한 기쁨에 대한 감사의 말을 그 호수에 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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