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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배우발견⑨] 기자에게도 팬심 돋는 배우가 있다(마이네임 박희순)


입력 2021.10.27 13:32 수정 2021.10.31 14:45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배우 박희순 ⓒ출처=네이버 블로그 spfh1502 배우 박희순 ⓒ출처=네이버 블로그 spfh1502

직업이 기자임을 잊고 자연인으로 돌아가 무작정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배우가 있다. 그 배우가 타고난 재능과 그에 더한 노력이 빛을 발해 대중의 사랑을 크게 받아 자리 잡으면 안도가 온다. 자신이 갈고 닦아온 그릇의 크기와 광택만큼 열매를 수확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마음이 간다. 박희순은 후자의 경우다.


박희순을 처음 마음에 품은 건 영화 ‘남극일기’(2005) 때다. 인간 세상과 동떨어진 그곳에서, 극한의 고난이 줄을 잇는 설원에 점점 광기가 번지는 무시무시한 영화에서 박희순은 남극탐험대 부대장 이영민을 연기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두꺼운 안경알, 빈틈없이 경로 파악의 임무를 말없이 해내는데 그나마 이들을 조난에서 구할 인물로 보이는 동시에 어딘가 비관적이고 염세적으로도 보인다. 뜨겁게 미쳐가는 탐험대장 최도형(송강호 분)과 달리 소리 없이 광기가 쌓여가고,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목소리도 좋고 딕션도 좋고 도수 높은 안경 너머의 눈을 궁금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영화 ‘세븐 데이즈’(2007), 빠른 컷 넘김과 숨 쉴 틈 주지 않고 흘러가는 스토리 속에서 처음엔 박희순을 못 알아봤다. 어쩜 저렇게 소리도 좋고 움직임도 좋은 배우가 있나, 그저 감탄만 했다. 배우 김윤진과 김미숙의 연기도 좋지만, 펄펄 날고뛰는 박희순에게 눈을 붙들렸다. 그만 쳐다봤다. 눈이 번쩍, 대배우가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느낌에 신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화 ‘헨젤과 그레텔’(2007)에서는 소위 ‘미친 연기’를 보여줬다. 유독 어린이를 노리는 연쇄살인마 변 집사, 아동학대를 일삼는 ‘즐거운 아이들의 집’ 원장을 연기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서 숨통이 졸리는 것 같았다. 미술 감각 뛰어난 이 작품에서 보여준 감각이 한 올 한 올 살아있는 박희순의 연기에 토를 달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다음엔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움직임을 줄이고 목소리 톤을 낮추고, 친구에게 아이도 아내도 빼앗긴 남자의 내면을 처절히 연기했다. 평범한 요리사(박희순 분)와 잘나가는 외환딜러(장현성 분), 절친이라던 둘 사이에 균열이 시작된다. 자본주의적으로 성공한 남자가 자신이 우월감을 느끼는 상대가 가진 행복의 원천, 가족을 시샘한다. 죄를 뒤집어쓸 만큼 아끼고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고뇌, 액션이나 장르 영화에서보다 더욱 박희순의 감정 응집력이 돋보였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2008) 얘기다. ‘동티모르의 히딩크’라 불리는 김신환 축구감독의 실화를 영화화한 ‘맨발의 꿈’(2010)에서는 선한 눈망울에 어울리는 순한 연기로 감동을 일궜다.


'마이 네임' 촬영현장 ⓒ소속사 박희순 블로그 '마이 네임' 촬영현장 ⓒ소속사 박희순 블로그

보통의 성장 코스로 하자면 이후 대체 불가 블루칩이 돼야 했다. 깊은 탄성을 자아낼 만큼의 연기력, 큰 키에 또렷한 이목구비 등 좋은 외형적 조건, 심지어 제작보고회나 언론시사회 및 인터뷰에서 확인되는 지성미와 뛰어난 유머 감각. 뭐 하나 갖추지 않은 게 없다.


결국은 흥행 파워인데, 영화 ‘10억’(2009)와 ‘혈투’(2011). ‘가비’(2012)의 성적이 아쉽긴 했지만 동일 연도에 개봉한 ‘작전’(2009)과 ‘의뢰인’(2011), ‘간기남’(2012)의 흥행은 괜찮았다. 흥행하지 못한 원인을 주연 배우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영화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뒤로 박희순에게 첫 번째 주연의 자리는 드물어졌다. 영화들이 멀티캐스팅 흐름을 띠게 된 영향도 있지만, 주로 블록버스터의 주연 또는 첫 번째 조연으로 그를 만났다.


배역 크기에 크고 작음일 뿐일 줄 잘 안다. 여전히 박희순은 다양한 작품 속에서 무서운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처음에 밝혔듯 팬심으로 좋아하는 배우다 보니 왠지 화나고 괜히 더 속상한 것이다. 왕 역에 제격인 기품이 있는 줄도 알고, 악역을 맡겨도 기막힌 조절력과 비밀을 숨긴 눈빛으로 개성 있게 표현하는 배우인 줄도 알지만, 박희순이라는 배우의 그릇이 넓이도 넓고 깊이도 깊은 줄 잘 알기에 아쉬웠다. 박희순이 지닌 기량을 마음껏 펼칠 작품을 기다렸다.


동천파 보스 최무진, 어둠과 허무 그 자체를 연기한 박희순 ⓒ화면 캡처 동천파 보스 최무진, 어둠과 허무 그 자체를 연기한 박희순 ⓒ화면 캡처

그리고 간만에 박희순 특유의 응집력과 비밀을 지닌 눈빛, 귀를 기울이게 하는 숨소리에 집중하게 하는 작품을 만났다. 신나서 8화까지 단숨에 내달렸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마이 네임’(연출 김진민, 극본 김바다, 제작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이다.


박희순에게 맡겨진 역할은 안으로는 마약조직 동천파의 보스이자 대외적으로는 리베르호텔 대표인 최무진. 모두가 그를 악마라고 부르고, 스스로 악마임을 인정한다. 배신자는 직접 처단하고, 어떠한 일에도 감정의 동요가 없는 냉혈한이다.


그런데 최무진을 박희순이 맡은 순간부터 머리가 복잡해진다. 결코 단순 악마라면 박희순에게 맡겼을 리가 없다는 생각, 팬심으로 봐선지 악마로만 보이지 않고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는 예단으로 최무진을 바라보니 때로는 작품의 비밀을 먼저 눈치채기도 하고 때로는 엉뚱한 연민과 이해로 인물을 오해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양쪽 모두 즐겁다는 것이다. 순풍에 돛을 다는 쪽이든 배가 산으로 가는 쪽이든 배우 박희순으로 인해 ‘마이 네임’ 보기가 훨씬 더 즐거웠다.


한 가지 궁금점, 여러 사람의 답을 들어보고픈 질문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여리고 촉촉한 눈망울을 가진 박희순에게 악마 역할을 맡기는 것은 자칫 미화를 부르는 잘못된 선택일까, 아무런 단서를 흘리지 않아도 반전을 예감하게 하고 인물에 깊이를 드리우는 최고의 캐스팅일까. 최무진을 극한의 악인으로 볼 수 없었다는 자백이고, 덕분에 ‘마이 네임’의 누아르 온도가 한층 더 올라갔다는 환호다.


그리고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을 찌를 칼을 자신이 연마하는 최무진의 인생이 눈에 들어올수록 대체 불가의 캐스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팬인 기자뿐 아니라 많은 시청자가 어둠이 드리운 박희순의 눈, 옅게 새어 나오는 박희순의 숨결에서 약육강식 세계의 정점에 선 것 같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절망, 내일을 고대하지 않는 자의 허무를 보았을 것이다. 흑색의 비관이 내리깔린, ‘누아르’ 그 자체인 박희순의 연기가 짜릿하다.


극에서 극을 담을 수 있는 그릇, 배우 박희순 ⓒ 극에서 극을 담을 수 있는 그릇, 배우 박희순 ⓒ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고 양지가 있어야 응달의 서늘함이 선명해지듯, 음지에서 살아온 최무진에게도 가끔 내리쬐는 햇살이 있다. 최무진의 입가에 미소를 부르는 윤지우(한소희 분)의 존재로 인해 우리는 순간 해맑아지는 박희순의 연기를 본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일순간 무장해제되어 천사 같은 미소가 잠시 눈꼬리에 입꼬리에 스친다. 그 영원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연기를 박희순이 해냈다.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대중 배우의 인기 역시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라 장담할 수 없지만, ‘마이 네임’ 이후 박희순이 좀 더 큰 사랑을 받기를 희망한다. 인기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손에 잡히지 않고 배우 인생에 추구해야 할 제1 목표는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바라는 이유가 있다.


자신이 본래 지닌 색과 향, 그릇의 크기에 어울리는 제격의 역할을 할 기회의 폭이 넓어진다. 또 사랑할 때 예뻐지고 잘생겨지는 것처럼 배우는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 윤이 나고, 빛이 나면 날개를 더 활짝 펴는 힘이 생긴다. 훨훨 나는 꼬리 긴 공작 한 마리를 계속 보고 싶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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