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옥룡(玉龍)은 살아있다 (9)

입력 2007.03.11 18:23  수정

뿐만 아니라, 사진에서 보듯이, 현무산(玄武山)을 풍수로 풀어 북쪽에 있는 산이라 한다 해도, 백계산에는 현무라 이름 할만한 산(山)도 혈(穴)도 없으며, 북쪽 산은 백운산 정상이다.

백운산과 백계산(白鷄山) 전경

혹여 있다 해도, 풍수에서 계(鷄) 즉 닭이 하늘을 향하여 홰를 치며, 비상(飛上)하거나, 포란(抱卵)을 하고 있는 혈처에, 현무(玄武) 즉 거북이와 뱀이 버티고 서서, 치켜든 닭의 목을 짓누르고 있고, 그 백계(白鷄)의 혈처에 옥룡(玉龍)이 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운평리 현무산은, 그 자체가 현무(玄武)와 같고, 그 현무의 혈처에 옥룡(玉龍)이 함께 있는 것은, 상생하여 상승 작용을 하는 상서로운 일이며,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들이 “현무산령두(玄武山嶺頭)”를, 사신(四神)의 방위를 인용하여, “백계산 북쪽 산꼭대기다.”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이는 운암사지(雲巖寺址)를 옥룡사로 만들기 위한 짜 맞추기 해석이라는 오해를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현무산령두(玄武山嶺頭)”에서, 현무산을 “백계산 북쪽 산”이라 하고, “령두(嶺頭)”를 “산꼭대기”라 하였는데, 령(嶺)을 “산봉우리”라 하고, 두(頭)도 “산머리” “산꼭대기”라 하여, 이것을 굳이 “백계산 북쪽 산꼭대기”라 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반적인 기록 문화에서처럼, “현무산정(玄武山頂) 현무산 산꼭대기”라고 하면 될 것을, “령두(嶺頭)”라 하여, 같은 의미의 글을 중복으로 써놓은 것은, 령(嶺)은 봉우리가 아닌 “재령” 고개를 넘는 “재”나 잇닿아 있는 산줄기 “산마루”를 표현한 것으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마치 살아있는 용(龍)들이 현무산 분지에 자리한 옥룡사를 휘감아 보호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즉 옥룡사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봉우리들을 “령두(嶺頭)”라 한 것은, 산 능선인 “령(嶺)”은 용의 몸체로 보고, “두(頭)” 즉 봉우리들을, 그 용들의 머리로, 승화 상징한 풍수사상의 표현이다.

따라서 비문에서 말하는 “현무산 령두(玄武山 嶺頭)”는, 방위(方位)와 상관없는 산의 형국을 말하는 것으로, “현무산 능선 봉우리”가 옳은 해석이며, “이날 새벽 현무산(玄武山) 능선 봉우리에서 4~5명의 어린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은, 현무산 옥룡사를 에워싸고 있는 여섯 개의 봉우리 즉 현무산을 지키는 오방의 신령들이 선사의 열반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뜻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옥룡사 상원(上院)에서 열반한 시신을, 다음날 백계산으로 옮겼다는 경보선사의 기록을, 위 백운산 사진으로 확인하여 보면, 경보선사의 시신이 옥룡사 상원에서 산 아래 있는 옥룡사 본사로 돌아가고, 백계산에서 백계산으로 옮겼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되고, 도선국사의 비는 백계산 옥룡사 북쪽에 있어야 하고, 경보선사의 비는, 백계산 동쪽 알 수 없는 운암 능선에 있어야 한다.

다음날 옥룡사(玉龍寺) 상원에서 열반한 선사의 시신을 운구하여, 백계산 감실(龕室)에 안치하고, 임시로 돌을 가져다가 그 입구를 덮었다는 경보선사 비문의 기록은, 현무산에서 열반한 시신을 백계산으로 옮겨, 임시로 감(龕) 즉 독(櫝) 즉 나무로 관을 만들어 안치하고, 그 위를 짐승들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돌을 덮어서 가매장을 하였다는 것이니, 이는 운평리 현무산 옥룡사에서, 추산리 백계산 운암사, 즉 지금 탑이 선 자리로 옮겨왔다는 뜻이다.

여기서 임금이 보낸 왕실의 석공이 석관(石棺)을 만들고, 탑과 비석을 조성하여, 2년 후 그 감실(龕室)을 열고, 시신을 백계산 동쪽 운암(雲巖) 산등성이에 봉안하고 탑을 세웠다는 것은, 또 다른 제 3의 장소로 시신을 옮겼다는 뜻이 아니다.

위 사진은 백계산 유적을 발굴하면서 발굴된 석관(石棺)과 유골이다. 좌측 중앙이 석관을 돌로 덮은 상태이며, 우측은 덮은 돌을 들어내고 다시 석관의 뚜껑을 개봉하여 유골을 확인하는 사진인데 학계와 관계당국은 도선국사 유골로 확정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석관과 유골은 나라의 석공(石工)을 시켜 돌을 다듬어 돌을 쌓고 석관(石棺)을 만들어 시신을 봉안하고 뚜껑을 덮고 탑을 세웠다는 경보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세골장(洗骨葬)을 지낸 경보선사의 유골이다.

옥룡사 상원(上院)에서 열반 한 경보선사의 시신을 운암사로 옮겨, 독(櫝) 즉 튼튼한 목관을 만들어 임시로 안치하고, 돌로 그 입구를 봉한 뒤, 2년 후 이른바 처음 초상(初喪)을 치룬 후 소상(小祥)과 대상(大祥) 즉 흔히 말하는 3년 탈상을 지내고, 선사를 위한 석관(石棺)과 탑(塔)을 완성하여, 육탈(肉脫)을 시킨 유골을 즉 세골장(洗骨葬)으로 석관 속에 영구히 봉안하였다는 뜻이며, 이는 곧 발굴된 석관과 유골은 경보선사의 것이라는 분명한 기록이다.

놀라운 사실은 부도탑이 있었던 8각 지대석 아래 석관(石棺 길이 95cm, 너비 54cm, 높이 48cm)속에서 물 속에 잠겨있는 유골을 발굴하였는데, 두개골에서 척추, 골반까지 원형대로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척추 좌우로 상지골(上肢骨)과 하지골(下肢骨)이 있었으며, 탑비와 부도를 보호하던 2동의 건물지가 있었다는 것은, 도선국사 비문의 기록에 삼간(三間) 건물을 지었다고 하였으니,

나머지 한 동은, 백계산 감실(龕室)에 시신을 모셨고, 2년 후 나라의 석공(石工)을 시켜 돌을 다듬어 돌을 쌓고, 석관(石棺)을 만들어 그 안에 세골장(洗骨葬)으로 수습한 유골을 봉안하고, 뚜껑을 덮고 탑을 세웠다는 경보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발굴된 석관(石棺)의 유골은 곧 경보선사라는 기록이다.

여기서 비문에 “층총(層塚)”이라 한 것은, 돌이 층(層)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므로, 석축을 쌓고 석관을 안치한 후, 그 위에 탑을 쌓았다는 뜻이며, 만약 석축과 석관이 아니라면, 비문에서 “층총(層塚)”이라는 말은 “적총(積塚)”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직접 현장 발굴을 보지 못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위 사진에서 눈여겨 볼 것은, 석관과 석축이 비례되지 않는 것은, 이 자리가 “호(戶)” 즉 경보선사의 감실이었으며, 경보선사는 제3의 장소 이동 없이, 본래의 자리에서 세골(洗骨)하여 석관에 봉안했음을 추정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경보선사와는 달리, 도선국사 비문에는, 유골에 관한 기록이 없으며, 본문에도 “좌탈입멸(座脫入滅)한 법구(法軀)를 옮겨 옥룡사 북쪽 산등성이에 탑을 세웠으니 대사의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하였고, 비를 세우는 내력과 그에 관한 일들을 상세히 기록한 비음기에도, “임금께서 량온서승(良醞署承)의 일을 보는 내시(內侍) 박봉균(朴逢均)을 그 곳으로 보내 공사를 감독케 하고, 태사국(太史局) 설호정(挈壷正) 이양정(李陽靖)을 보내 그 비석을 세울 터를 정하게 하였다.” 했을 뿐, 마땅히 있어야할 유골에 관한 기록은 한마디도 없다.

임금이 태사국 벼슬아치 이양정(李陽靖)을 보내, 그 비석을 세울 터를 정하게 하였다는 비문의 기록을 보면, 도선국사의 탑비를 대대적으로 정비했음을 알 수 있음에도, 유골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곧 발굴된 유골은 도선국사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특히 주지해야할 분명한 사실은, 만일 발굴된 유골이 도선국사의 것이라면, 기록 그대로 좌탈입멸한 법구를 교정이나 훼손 없이, 모습 그대로 안치했을 것인데, 석관의 높이가 48cm에 불과하니 맞지 않고, 세월이 흘러 자연 분해 된 유골이, 석관 내에 흩어져 있어야 함에도 가지런히 세척되어, 세골장(洗骨葬)으로 안치되어 있다는 것은, 유골의 주인이 도선국사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사실이 이처럼 분명하고, 석축과 석관의 축조과정과 이른바 육탈을 시켜 영구 안장하는 세골장(洗骨葬)까지 상세히 기록한 경보선사의 탑비조성 기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록이 없는 “도선국사”의 유골로 규정하여, 탑비를 복원한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발굴된 유골이 도선국사의 것이라면, 비문의 기록에 “백계산 감실(龕室)에 시신을 모셨고, 2년 후 나라의 석공(石工)을 시켜 돌을 다듬어 돌을 쌓고, 석관(石棺)을 만들어 그 안에 세골장(洗骨葬)으로 수습한 유골을 봉안하고, 뚜껑을 덮고 탑을 세웠다”고, 분명하게 적시한 경보선사의 석관과 유골은 어디로 갔는가? 묻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만일 현장을 발굴하고 감독한 학계와 관계당국이 이에 대한 소명자료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는 학계와 관계공무원들이 공모한 희대의 사기극이라 해야 할 것이다.

더욱 기막히고 가관인 것은, 최근 발굴하여 탑을 복원하면서, 경보선사의 탑이, 스승인 도선국사를 향하여 부복하고 있는 모습으로 상징하였는데, 이는 스승과 제자가 뒤바뀐 것이니, 스승인 도선국사가 제자인 경보선사 옆에서 부복(俯伏)하고 있는 모습이므로, 세상에 다시없는 조롱거리가 또한 이것이라 할 것이다.

최근 발굴 복원된 도선국사(1번)와 경보선사(2번) 두 사제의 탑(塔)과 비(碑)다. 유골이 발굴된 그 자리에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2번이 도선국사이고, 1번이 경보선사의 탑이어야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