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뮤지컬의 역사를 새로 쓴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지난 6월 토니상 6개 부문을 석권하며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던 이 작품은, 주인공 올리버 역에 다음 달부터 백인 배우 앤드류 바스 펠드먼을 세우기로 하면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한국에서 창작되어 아시아계 배우들이 주연을 맡아왔던 작품이 브로드웨이에서 ‘백인 배우’를 선택한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아시아 대표성’을 훼손하는 ‘역행’이라며 실망감을 표출한 것이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가 공동 창작한 뮤지컬로, 인간을 돕는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주인공이다. 서울과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그동안 필리핀계 배우 대런 크리스를 포함한 아시아계 배우들이 주연을 맡아왔다. 브로드웨이에서 아시아 배우들이 보편적 이야기를 자신들의 얼굴로 구현하는 성공 사례로 여겨지며, 작품은 곧 ‘아시아 대표성’의 상징이 됐다.
한 공연 관계자는 “브로드웨이에서 최근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다양성이다. 캐스팅에 있어서 이런 피시적 결정들이 아주 중요한 철학적 담론으로 형성되고 있다”면서 “이걸 거스르는 프로덕션을 언피시적인 프로덕션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해피엔딩’은 브로드웨이가 추구하는 가장 올바른 방향의 프로덕션이었던 셈”이라고 평가했다.
그런 작품에 백인 배우 앤드류 바스 펠드먼을 캐스팅한 것이 아시아계 배우들과 관객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겼다는 것이다. 일종의 ‘배신감’인 셈이다. ‘아시아계 미국인 공연예술인 행동 연합’은 이 결정이 “아시아계 배우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를 줄이는 선례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영화 쥬라기 공원 등에서 연기한 유명 아시아계 배우 BD 웡 역시 “가볍게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겠지만 이번 일은 아시아계 배우들과 관객에게 뺨을 때리는 듯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그냥 넘길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다 보면 한 가지 모순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어쩌면 해피엔딩’이 아시아 대표성을 훼손했다는 논리가 성립하려면, 국내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멤피스’ 역시 한국인들이 공연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사례는 두 작품의 본질적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다양성’에 대한 우리의 편협한 시각을 꼬집는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주인공 올리버와 클레어는 ‘인간’이 아닌 ‘로봇’이다. 작품의 배경은 한국이지만, 이들의 정체성은 ‘한국인’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랑과 이별의 감정을 배우는 ‘로봇’이다. 캐릭터의 인종이나 국적이 이야기의 핵심적인 서사나 갈등 요소가 아니며, 이 작품의 메시지는 인종을 초월하는 보편성에 기반을 둔다. 반면, 1950년대 미국 인종차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멤피스’는 ‘백인’ 라디오 DJ와 ‘흑인’ 가수의 이야기를 다루며, 인종적 갈등과 그 경계를 넘어선 화합이 핵심 서사다. 주인공들의 인종적 정체성과 그들이 겪는 차별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자 본질적인 요소로, 흑인과 백인의 관계가 아니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멤피스’는 인종적 정체성이 서사의 핵심이지만, 한국에서는 뛰어난 한국인 배우들이 가발로 흑인과 백인을 구별하고 연기를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면서 국내에서 크게 흥행해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인종적 정체성이 서사의 본질인 작품조차도, 예술적 재해석과 배우의 역량으로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인종이 서사의 본질인 작품을 다른 인종의 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허용하면서, 인종이 서사의 본질이 아닌 작품에 다른 인종의 배우가 출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논리는 모순적이다. ‘멤피스’의 성공은 작품의 본질과 캐스팅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유연한 시각이 가능함을 보여주며, ‘어쩌면 해피엔딩’을 향한 비판의 논리가 가진 허점을 꼬집는다.
더군다나 브로드웨이가 중요하게 여기는 ‘다양성’은 단순히 ‘인종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인종과 성별, 나이, 장애 여부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다양성, 그리고 이 포용적 캐스팅은 배역에 가장 적합한 배우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박천휴 작가 역시 “이 우화적인 로봇 이야기를 누구든지, 어디에서든 편안하게 공연할 수 있도록” 작품을 썼다고 밝혔다. ‘아시아 캐스팅’만을 고집하는 주장은 오히려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훼손하는 ‘언피시(Un-PC)’적인 행위로 비칠 수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백인 캐스팅은 배우의 국적이나 인종을 넘어선 진정한 의미의 포용적 캐스팅을 시도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물론, 백인 배우로의 교체가 흥행을 위한 ‘상업적 논리’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하지만 일정 수준의 수익을 내야 공연을 지속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 구조상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더구나 수익을 내야 하는 제작사 입장에선 기존의 캐릭터성을 이어가면서 2019년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의 에반 역으로 브로드웨이에서 데뷔한 펠드먼과 같이 티켓 파워를 거느린 스타를 캐스팅하는 건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현실적 판단 이면에는 작품의 본질에 충실하며, 가장 적합한 배우를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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