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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건희 별세] 평생 정치와 '불가근불가원'…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14위


입력 2020.10.25 14:01 수정 2020.10.25 14:01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우리나라 정치는 4류"…'작심발언' 하면서도

평생 '사업보국' 일념, 정치와 일정 거리 유지

홍사덕 "학창 시절 때부터 '공장 많이 지어

일자리 많이 만드는 게 애국'이라 말해"

고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 ⓒ뉴시스 고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 ⓒ뉴시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일념으로 국익에 힘써왔지만, 평생 정치와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거리를 지켜왔다.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한 것도 고인의 이러한 삶자취가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25일 별세한 이건희 전 회장은 1966년 TBC 동양방송 입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중앙일보 이사까지 지냈다. 언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서 정치권력을 자세하게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이 전 회장 스스로도 생전에 우리나라 정치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인은 1995년 중국 방문 도중 베이징 특파원 간담회에서 "우리나라는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작심 발언'으로 정가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내심을 극히 드물게 토로했던 것 외에는 일생 정치와 불가근불가원의 소신을 가지고 일정한 거리를 철저히 지켰다. 이 전 회장은 중앙일보 이사 시절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정치인은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는 게 아버님(호암 이병철)의 신념"이라며 "기업은 무한하고 정치인은 유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0년대초 정치의 문민화(文民化)를 전후해 재계 인사들 일부가 정치에 나설 때, 고인에게도 정치를 권하는 인사들이 잇따라 찾아오자 이 전 회장은 "기업하는 사람이 정치에 발을 디딘 경우를 쭉 봤지만, 정치도 기업도 제대로 안되는 것 같다"며 "정치의 불안에 기업이 영향을 받는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일화도 전한다.


당시 정당의 창당에 관여하거나 직접 대선에까지 출마했던 동시대 재계 인사들이 얻은 결과를 고려해보면, 이 전 회장의 이러한 입장은 선견지명이자 혜안에 가깝다는 평이다.


이건희 전 회장의 이러한 소신은 소싯적부터 형성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전 회장과 서울사대부고 동기동창인 6선 중진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은 고인이 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보다는 경영을 통해 국익에 기여하는 방안을 고민해왔다고 전했다.


홍사덕 전 부의장은 "(이건희 전 회장은) '다른 게 애국이 아니다. 공장을 많이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애국'이라고 했다"며 "당시(1950년대 후반)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힘든 독특한 사고였다"고 회상했다.


4·19 혁명 당시 고등학생들이 길거리에 쏟아져나왔듯이, 당시에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면 이미 '엘리트'에 속하는지라 홍 전 부의장을 포함한 주변 또래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은 그 시절부터 이미 사업보국의 소신이 뚜렷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건희 전 회장의 '사업보국' '정치와는 불가근불가원' 소신은 선친 호암 이병철 전 회장과 장인인 홍진기 전 내무부 장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더욱 선명해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호암은 1966년 이른바 '사카린 밀수 파동'에 연루돼 홍역을 치렀다. 이듬해인 1967년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정치자금을 마련하려는 정치권력의 지시를 받아 한 일인데도, 들통이 나자 정치권력은 쏙 빠져나가고 기업과 기업인만 큰 타격을 받았다. 이후 호암은 정치권력과의 '불가근불가원'을 철저히 당부했다고 한다.


장인 홍진기 전 장관은 1960년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이 3·15 부정선거를 주도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위군중에 발포를 명령해 경질되자 후임 내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장관으로 임명된지 한 달만에 정권이 무너졌기 때문에 뭘 할 수도, 해볼 수도 없었지만 5·16 군사정변 이후 전 정권 청산 차원에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 홍 전 장관도 이후 다시는 정·관계에 몸을 담지 않았다.


이건희 전 회장도 "장인은 기업 경영과 정치·법률·행정 등이 서로 어떻게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자상하게 설명해줬다"라며 "나는 (선친과 장인)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경영에 관한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배운 셈"이라고 회고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력과의 거리를 지키라는 생각도 함께 전달됐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치권서 국익 관계된 요청 오면 발벗고 나서
'3수' 평창동계올림픽 '1차 과반' 유치에 역할
정병국 "몸 불편한데도 전세계를 직접 몇바퀴
유치 됐다는 게 발표되자마자 눈물 흘리더라"
고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이 지난 2011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강원도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직후,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감사의 인사를 받고 있다. ⓒ뉴시스 고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이 지난 2011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강원도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직후,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감사의 인사를 받고 있다. ⓒ뉴시스

이처럼 이 전 회장은 일평생 정치와 철저히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당색(黨色)과 정파를 넘어 국익과 관계된 일로 정치권의 요청이 오면 발벗고 나섰다.


강원도 평창이 2003년 7월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캐나다 벤쿠버에 밀려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뒤, 이듬해 국제스포츠계의 실력자이던 김운용 IOC 부위원장이 배임수재·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자 이 전 회장은 이 사건이 다음 동계올림픽 유치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다.


이 전 회장은 당시 "김운용 부위원장이 한국에서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으면 IOC 위원으로서의 자격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하는 등 국내 누구보다 발빠르게 이 문제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 부위원장이 실제로 IOC 위원 자격을 잃자 2011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IOC 총회를 앞두고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이건희 전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평창은 2003년에 이어 2007년 과테말라 IOC 총회에서도 러시아 소치에 밀려 미끄러지면서 동계올림픽 유치 3수에 나선 처지였다. 이번에도 유치에 실패하면 국익 손실도 물론이거니와 국민들의 사기 저하가 심각할 상황이었다.


이건희 전 회장은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전세계를 몇 바퀴씩 돌며 여러 IOC 위원들을 1대1로 접촉하며 설득했다. 고인의 분투 덕분에 평창은 2011년 7월 더반 IOC 총회 1차 투표에서 95표 중 63표를 쓸어담으며 유치전을 끝냈다. 3수 끝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이라는 희소식을 고국에 전해온 것이다.


이건희 전 회장은 더반 IOC 총회 당시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유치에 성공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환호했지만, 정작 지난 2018년의 평창동계올림픽 때는 건강 문제로 개·폐막식 참관 등을 일체 하지 못해 유치 과정에서 고인의 혁혁한 공로를 아는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남아공 더반에서 유치 성공의 장면을 이 전 회장과 현장에서 함께 지켜본 5선 중진 정병국 국민의힘 전 의원은 이날 데일리안과 통화에서 "몸이 불편한데도 전세계를 몇 바퀴씩 직접 돌지 않았느냐"라며 "유치가 됐다는 게 발표되자마자 눈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그냥 우는 것을 바로 옆에서 봤다"고 회상했다.


정병국 전 의원은 "그 당시에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실질적으로 정말 큰 힘이 됐다"라며 "지금도 몸도 불편한데 유치하느라 동분서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명복을 빌고 영면하셨으면 좋겠다"는 소회를 밝혔다.


한국갤럽이 지난해 5월 9일부터 25일까지 17일간 전국의 13세 이상 남녀 17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설문한 결과, 이건희 전 회장은 이순신 장군(1위)·세종대왕(2위) 등에 이어 14위에 랭크됐다.


당시 생존한 인물로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9위)·이국종 아주대병원 외상연구소장(13위)에 이어 세 번째였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15위)이나 문재인 대통령(16위)보다 높은 순위였다.


별세한 이 전 회장에 대한 이같은 국민의 평가는 기업인으로서 철저히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지키면서도, 국익에 관계된 일이라면 '사업보국'의 신념으로 발벗고 나섰던 고인의 행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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