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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올드무비⑤] 세계적 명배우들이 자비에 돌란을 만났을 때 ‘단지 세상의 끝’


입력 2020.07.26 10:01 수정 2020.08.09 19:26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제69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영예

나의 죽음을 알리기 위한 작가(가스파르 울리엘)의 여정

마리옹 꼬띠아르, 뱅상 카셀, 나탈리 베이, 레아 세이두 가세

자비에 돌란이 지휘하는 연기파 배우들의 ‘언어의 향연’

영화 '단지 세상의 끝' ⓒ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단지 세상의 끝' ⓒ ㈜엣나인필름 제공

‘배우탐구’ 코너를 통해 다룬 바 있는 자비에 돌란이 연출한 영화는 그가 출연한 영화, 출연하지 않은 영화로 나눌 수 있다. 작품마다 매번 새로운 시도와 화법, 영상과 장르를 보여 주기에 그 외의 구분은 필자에게 쉽지 않다.


지난번에도 언급했듯 ([관련기사] '그는 여전히 천재다. 자비에 돌란') 개인적으로 돌란이 출연한 영화를 사랑하는데, 칸국제영화제는 그가 출연하지 않은 영화들에 트로피를 주었다. 지난 2014년 ‘마미’에 굳이 등수로 말하면 3등 상인 심사위원상을, 2년 뒤 제69회 시상식에서는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영화 ‘단지 세상의 끝’에 2등 상인 심사위원대상을 수여했다.


‘단지 세상의 끝’(수입·배급 ㈜엣나인필름)에는 자비에 돌란 영화상 처음으로 세계가 사랑한 프랑스의 명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배우의 유명세보다는 신선한 스토리와 그에 대한 접근법, 감각적 영상과 편집과 음악이 압도적 만족감을 주는 돌란의 영화에 실력파 배우들이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영화 포스터 ⓒ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포스터 ⓒ ㈜엣나인필름 제공

절친 안느 도발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5년 전 유명 극작가 장 뤽 라갸르스가 쓴 동명의 희곡을 건넸다. 도발이 무대에 올렸던 작품으로, 당시 자신이 준비하고 메모했던 모든 자료를 돌란에게 넘겼다. “너에겐 꼭 읽어 볼 의무가 있어”라는 말과 함께. 돌란은 친구 말을 따랐지만, 고이 접어 서재 꼭대기에 두었다. 데뷔작 ‘아이 킬트 마이 마더’를 찍은 뒤였다.


시간은 위대하다. 5년이라는 시간은 ‘단지 세상의 끝’을 다르게 보고 새롭게 해석할 힘을 자비에 돌란에게 부여하고, 함께할 배우들을 만나는 계기와 타이밍을 만들었다. 영화 ‘마미’로 칸에 갔을 때 만난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마리앙 꼬띠아르가 시작이었고 ‘로렌스 애니웨이’에서 함께했던 명배우 나탈리 베이와 다시 작업하고 싶었고 악역과 선역이 두루 가능한 뱅상 카셀, 무섭게 떠오르는 배우 레아 세이두, 프랑스가 사랑하고 끝내 세계인이 사랑할 가스파르 울리엘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명배우들이 필요했던 이유는 어쩌면 지금부터다. 연극 무대에서 영화로 옮겨진 ‘단지 세상의 끝’을 보면 휘몰아치는 대사와 침묵, 다시 이어지는 대화의 비아냥과 친절, 머뭇거리는 행동과 무례한 개입 속에 인간의 슬픔과 외로움, 그리움과 열등감, 사랑과 분노가 격정적으로 일렁인다. 여느 배우가 쉽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과 표정, 움직임이 아니다. 자비에 돌란의 캐스팅은 적절했고 그것은 화면 위에서 인증된다.


유명 작가 루이(가스파르 울리엘)는 12년 전 떠나온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에 있다.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오랜 시간을 돌아 집을 찾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나탈리 베이)는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고 자신도 과하리만큼 화려하게 치장한다. 어려서 기억에 없는, 그러나 분명 내 작은 오빠인 루이를 동경해 온 막내(레아 세이두)는 설레는 마음으로 오빠를 기다리고 자신이 제법 잘 성장했음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매사 못마땅한 형(뱅상 카셀)은 오늘따라 더 신경질적 태도로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12년 만에 찾은 집에서 루이가 당장 마음 붙일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보는 형수(마리옹 꼬띠아르), 2세 없이 곧 세상을 뜰 자신의 이름을 조카의 미들네임으로 붙여 준 사람이다.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도, 그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것도 루이에겐 쉽지 않은 숙제인데. 12년 만에 만난 가족들은 환영도 잠시, 각자의 마음속 원망과 분노를 드러낸다. 만일 루이가 타향살이에 지쳐 남루한 몰골로 돌아왔다면 달랐을까. 파리에서 성공한 작가, 신작을 내면 TV에도 출연할 만큼 유명해진 루이 앞에 가족들의 서운함과 열등감은 폭발한다. 루이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선 입도 떼지 못한다. 달리 생각해 보면 어머니와 막내, 형의 가족은 늘 함께였고 혼자였던 건 루이다. 루이에게도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일생은 건 선택과 그것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 가족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비난은 떠난 자에게 몰리고, 남은 자들의 슬픔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게 하는 명분이 된다.


‘단지 세상의 끝’은 언어가 8할을 하는 영화다. 감정의 방향과 태도에 따라 말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고요한 바다로 잠이 든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예술 언어가 아니라 일상에서 우리가 감정을 실어 말하는 세기와 억양, 말의 버벅거림과 잘못된 어법 그리고 그것을 정정해 다시 말하는 화법, 같은 말을 반복하는 모습 등이 생생하게 담겼다. 이것은 원작자 장 뤽 라갸르스의 희곡에 적힌 그대로이고, 원작의 언어 그대로를 스크린에 옮기는 게 이 영화의 의미라고 생각한 자비에 돌란의 의지이며, 훌륭한 배우들이 보여 준 명연기의 결과다. 백번 말해도 소용없고, 정말이지 꼭 영화를 통해 확인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언어의 향연, 때로는 바이올린과 첼로, 더블베이스와 심벌즈 그리고 피아노가 협연하는 듯한 이 교향곡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는 단연 자비에 돌란이다. 아주 느리게, 몰토 아다지오에서 프레스티시모, 아주 빠르게까지 변화무쌍하게 연주되는 영화. 다섯 배우의 내공 연기를 통해 연극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영화로서도 명품으로 완성된 ‘단지 세상의 끝’. 몇 번 새로운 걸 파격적으로 보여 주다 사라지고 말 어설픈 천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자신의 확장성을 증명할 예술가임을 자비에 돌란은 이 영화를 통해 입증했다.


그것은 현장에서부터 확인되고 있었다. 영화계의 아이돌처럼 보이는 꽃미남 외모에 다소 거만하다는 소문은 자비에 돌란의 내면과 핵심을 가리지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치열하게 사색하고, 결정하고 나면 치밀하게 준비하고, 촬영이 시작되면 겸허한 태도로 연출한다. 지난 2017년 개봉 당시 공개됐던, 영화를 함께했던 다섯 배우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시간을 함께했던 그들의 말에 진실이 있다.


가스파르 울리엘 ⓒ 가스파르 울리엘 ⓒ

#가스파르 울리엘

“자비에는 약간 거만하고 젠체하는 이미지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촬영장에서 무척 겸손하고 정중했고 가끔은 소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 작업은 자비에의 ‘세이프티존’을 넘어선 것이지 않나. 배우이자 감독인, 배우의 작업을 잘 이해하는 자비에의 시선으로 필름에 담기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의 시선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찬양되는 거다. 왜냐하면 결국 자비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작은 반응과 숨결, 떨림, 머리카락의 모양 같은 작은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자비에는 아주 미세한 감정의 떨림까지도 마치 지진계처럼 기록한다. 아주 큰 것과 아주 작은 것을 조합하는 연금술을 지니고 있다.”


마리옹 꼬띠아르 ⓒ 마리옹 꼬띠아르 ⓒ

#마리옹 꼬띠아르

“처음에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문체의 섬세함이라든가, 그런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들 말이다. 겁이 많이 났고, 불안해서 곧장 자비에에게 그 이야길 했다. 하지만 동시에 문체에 매혹되기도 했다. 쉼표 하나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비에에게 함께 작업을 하고 싶기는 한데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었다. 솔직히 자비에와 작업하는 게 약간 무서웠다. 하지만 동시에 흥분되는 일이었다. 자비에는 현장에서 변화를 즐겼고 그의 연출은 마치 ‘라이브 아트’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기법이었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뱅상 카셀 ⓒ 뱅상 카셀 ⓒ

#뱅상 카셀

“사람들은 자비에를 아이돌이라고 부르는데 그게 다는 아니다. 그는 꿈꾸고 상상한다. 현장에 도착하면 컷이라든지 색깔, 그런 것들이 벌써 다 준비되어있다. 게다가 그렇게 준비한 것들을 항상 재검토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하기도 한다. 닫혀있지 않다. 그리고 배우들을 사랑한다. 배우들이 작업하는 방식과 배우들이 가진 것에 맞춰서 그들을 기용한다. 모든 작업이 유쾌하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진행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자비에는 항상 무언가를 찾고 있고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탐구하고, 공부하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짠하고 ‘천재’로 태어난 게 아니라는 거다. 그와 함께 작업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나탈리 베이 ⓒ 나탈리 베이 ⓒ

#나탈리 베이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를 촬영할 때 자비에는 22~23살의 청년이었다. 그때에는 몰랐지만 당시에도 자비에는 그 나이에 자기가 원하는 것 그대로 영화를 무척 쉽게, 여유롭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시에도 놀라울 정도로 성숙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자비에는 모든 것을 직접 계획하고 실행하고 통제했는데 심지어 억양까지 정해줬다. 한 문장을 10가지 버전으로 읽게 하기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비에만의 프레이징과 음악을 주면 배우들은 그에 맞춰서 재해석했다. 이렇게 엄청난 재능을 가진 젊은 감독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큰 행운이었다.”


자비에 돌란과 레아 세이두(오른쪽) ⓒ 자비에 돌란과 레아 세이두(오른쪽) ⓒ

#레아 세이두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역할뿐만 아니라 감독인 자비에도, 같이 작업한 배우들도, 시나리오도 모두 선물 같았다. 영화 자체가 선물이었달까. 거부할 수 없는 종류의 프로젝트였다. 자비에는 배우로서도 현장에서 함께 하기 때문에 우리가 웃을 때 같이 웃고 감정을 나눈다. 그 점이 자극이 되었다. 젊고 신선한 에너지가 현장 분위기를 좋게 만들었다. 나 역시 나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다. 왜냐면 자비에의 마음에 들고 싶었고, 최선을 다하고 싶었으며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지 세상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흔히 말하는 인생 절벽, 낭떠러지 일보 전.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루이에게 그들은 가족이 아니라 낭떠러지보다 더한 추락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고, 두고 생각나며 생각이 바뀌었다. 살인과도 같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잘못이나 루이처럼 자신의 죽음을 말할 수 있는 그 누가 당신에게 있는가. 피가 섞였든 섞이지 않았든 그가 당신의 진정한 가족이다. 루이는 다음번에는 12년보다 짧은 시간 내에 오겠다고, 가족의 얘기를 묵묵히 다 듣겠노라고 다짐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우리라면 늦기 전에 움직이자.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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