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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성의 여정] 성공한 '연대' 사업가 윤미향


입력 2020.06.03 07:00 수정 2020.06.03 05:08        정계성 기자 (minjks@dailian.co.kr)

지난 5월 29일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활동 기간에 불거진 부정 의혹 등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하고 있던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모습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지난 5월 29일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활동 기간에 불거진 부정 의혹 등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하고 있던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모습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2018년 겨울 청와대를 출입했던 때의 일이다. 한 공기업 소속 비정규직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청와대 사랑재 앞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었다. 지인과 일부 관련이 있는 일이었고 취재겸 현장을 찾았다. 혹한의 추위 속 스티로폼과 침낭에 의지한 단식농성은 처절함 그 자체였다.


현장에서 만난 담당자는 해당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 비정규직들의 열악한 처우 등을 호소했고,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요구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사안의 최대 쟁점인 ‘직접고용’ 문제는 우선순위에 언급하지 않았었다. 문재인 정부가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만큼, 지엽적인 내용만 협의되면 협상타결이 가능해 보였다.


궁금했던 것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사면’ ‘노동법 전면 개정’ ‘탄력근로제’에 대한 입장이었다. 노조를 결성하며 민주노총에 가입했던 단체였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주최하는 집회에 참석해 힘을 보태기도 했다. 머뭇거리며 답변을 피했던 그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이동한 뒤에야 말을 꺼냈다. 추측컨대 민주노총에서 파견나온 사람이 주위에 있었던 것 같다.


기억나는 말을 적자면 “그런 내용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우리 사업 관련해서만 알고 있다” “사내 불의한 게 있었고 우리 목소리를 내야겠는데 우리 같은 무지랭이들이 뭘 알겠나. 막막한 상황에서 노조설립과 투쟁방법을 알려준 게 민주노총이다”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함께하고 있다” 등이었다. 요약하면 ‘연대투쟁’이었다.


연대투쟁 혹은 연대사업은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들이 추구하는 중요한 투쟁 방법론 중 하나다. 약자들의 목소리는 작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는 취지다. 대학시절 한번쯤 해봤던 ‘환활’이나 ‘농활’도 비슷한 맥락이다. 세력이 커질수록 협상 상대자에 압박으로 작용하는 효과는 분명하다.


하지만 연대가 커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역설적으로 협상타결은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다. 특정 단체의 요구만 들어주기 어려운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요구사항이 일괄적으로 받아들여지긴 더욱 요원한 일이다. 내부적으로는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됐다고 빠져나가는 단체는 ‘배신자’가 되는 구조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처음의 취지는 흐려지고 ‘조직논리’만 강화된다. 권력누수나 조직력 약화를 꺼리기에 소속된 개별세력이 독자적으로 협상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계속된 취재를 하지 않아 이후 상항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신문지면을 통해 보기로는 협상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고, 비정규직 노동자끼리 노선이 달라지며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당시 만났던 관계자를 다시 만난 적은 없지만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할까. 아니면 옳았다고 생각할까.


지난 이야기를 새삼스레 다시 꺼내는 것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윤미향 사태’와 겹쳐졌기 때문이다.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와 관련도 없는 정신대를 끌어들여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했다. “위안부는 만두의 고명이었다”며 “나는 그것을 모르고 30년 간 이용만 당했다”고도 했다. 혹자는 뜬금없는 이야기라고 했지만, 연대투쟁의 허점과 조직논리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정확히 꼬집은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실제 정의연의 회계 공시를 살펴보면, 연대사업을 꽤나 했다. 위안부와 정신대에 이어 5.18민주화항쟁, 세계 여성 전쟁피해자 운동, 나아가 여성인권까지 영역을 넓혔다. 위안부 문제를 세계여성인권 현안으로 만들어 해결해보겠다는 취지로 이해한다. 그 과정에서 외연이 확대됐을 것이고 아마도 모금액이나 정부 보조금 액수도 커졌을터다. 정부가 위안부 협상 내용에 대해 정의연과 일부 공유했다고 하니 정치적 위상도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정의연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정부에 등록된 240여 명의 피해 할머니 대부분은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고 남은 생존자는 이제 17명 뿐이다. 30년 간 수요집회를 함께해왔던 이용수 할머니는 울분을 토하고 있다.


같은 기간 ‘활동가’였던 윤미향 의원 개인은 어땠을까. 꼬박꼬박 저축한 돈으로 내집마련에 성공했고, 사실상 정대협의 ‘종신’대표로 일하며 남편에겐 일감을, 아버지에겐 일자리를 줬다. 통장에는 3억원이 넘은 예금을 보유했고, 연간 억대가 넘는 딸의 미국 유학 비용도 감당하고 있다. 대한민국에 300명 뿐이 없는 헌법기관인 국회의원 자리도 꿰찼다. 여러 의혹에도 불구하고 거대여당의 핵심 인사들이 비호를 해주니 입지도 탄탄하다. 이 정도면 누구보다 성공한 ‘연대사업가’라 할만 하지 않은가.

정계성 기자 (minjks@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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