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안 대선기획> ´유력 대통령후보, 그는 누구인가´ 이명박 <7>
정계 입문에서부터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질곡의 정치 인생´
데일리안 : 만일 정치인이 안 됐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이명박 : 아마 ´시인´이 됐을 겁니다. 어린 시절 밤이면 하루 동안 생각하고 느꼈던 것을 끄적이곤 했습니다. 시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글들이었지만…. 기업에 있을 때도 동호회에 가입해 낭송회를 따라다닐 정도로 시에 대한 관심이 깊었죠.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후보가 정계에 입문한 것은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던 신한국당의 전국구 공천을 받으면서다.
당시 신한국당 대표로서 대권을 노리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전문경영인’ 영입을 필요로 하던 터.
이 후보의 ‘정치인’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이 후보의 정계 진출은 27년간 몸 담았던 현대그룹, 특히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앞서 노태우 정권 말기였던 91년 정 명예회장은 1600여억원의 추징금을 맞은데 대해 ‘앙심’을 품고 아예 정치를 하겠다며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왕(王) 회장’이라 불리던 정 명예회장으로부터 부자지간 이상의 총애와 신뢰를 한 몸에 받았던 이 후보였지만 정 회장의 정치 행보만큼은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기업인이 정치에 나서면 개인은 물론, 기업 자체에도 너무 큰 위험이 따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정 회장은 이 후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계 진출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자신과 함께 이 후보가 회사를 떠날 것이라고 ‘공식 선언’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 후보의 현대건설 ‘회장’직 사퇴는 정 명예회장의 단독 결정이었던 셈이다.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두 사람, 지금까지도 이 후보와 ‘현대가(家)’와의 관계가 서먹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업인 이명박’에게 정치판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어쩌면 빛보다 그늘이 많았고, 줄곧 ‘비주류’로 맴돌며 2002년 서울시장에 당선되기 전까지 다시금 좌절과 실패를 맛본 시기이기도 했다.
´국가 경영´의 기치를 내걸고 정치색보다는 실용주의를 앞세웠던 ‘국회의원 이명박’은 정치 입문 초기 다분히 ‘개혁적’인 면모를 보였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92년 국정감사에서 ‘경제기획원 산하 연구기관의 통·폐합’을 주장하는가 하면 94년엔 남북 민간단체들의 합동 ‘광복 50돌 행사’ 준비를 주문하는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제안을 거침없이 내놨다.
또 대기업 CEO(최고경영자) 출신이면서도 ‘대기업 소유집중완화특위’ 설치를 요구했고, 95년엔 당시 김영삼 정부가 내건 ‘세계화’의 개념이 “모호하다”고 질타하기도 했었다.
아울러 그의 대표 공약인 경부운하, 즉 ´한반도 대운하´가 처음 일반에 공개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하지만 93년 공직자 재산신고 당시 부실 신고 파문이 불거지면서 그의 개혁적 이미지가 한풀 꺾이기도 했다.
95년 지방선거 때의 일이다.
이 후보는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놓고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 경선을 치렀다.
그러나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마음은 정 전 총리에게 가 있던 터.
선거운동은 물론, 투·개표 과정에까지 불공정 논란이 일었다.
심지어 상대 후보 연설에선 멀쩡하던 마이크가 이 후보 차례만 되면 오작동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승리’는 예상대로 정 전 총리의 몫이었다.
“상대 후보는 당선 소감에서 나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안 했지만 난 축하 말에서 ‘그나마 경선이라도 받아준 대통령께 감사한다. 당선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이명박, 2002) 중에서
이 후보는 결과에 승복했다.
이 후보는 훗날 당시 상황과 관련, “만일 내가 약점이 있었다면 경선 후보에서 밀려났을 것이다. 밀려날 뿐만 아니라 그 순간이 정치 생활의 마지막이었을 것이다”며 “경선 후보에서 사퇴하지 않자 나의 재산 형성 과정은 물론 사생활까지 샅샅이 조사됐던 것은 오히려 잘 된 일로 내겐 투명성을 검증받는 기회가 됐다”고 회고했다.
이듬해 열린 15대 총선, 전국구 꼬리표를 떼기 위해 이 후보가 출마한 곳은 서울 종로구.
YS와 민자당 대통령후보 자리를 다툰 4선 경륜의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그리고 현 대통령으로 당시 ´청문회 스타´로 세간의 주목을 끈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함께 ‘정치 1번지’에서 맞붙었다.
이 후보는 “다음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가 누구인지 논의될 때 그 중 한 사람으로 포함되고 싶다”며 ‘50대 기수론’을 폈다.
투표함을 열어본 결과 이 후보가 승리했지만, 그는 ‘승자’인 동시에 ‘패자’가 돼야만 했다.
당선 직후 법정 선거비용 초과 등 선거법 위반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재판이 시작됐고, 이 후보의 위증교사·범인도피 등의 의혹까지 제기됐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정치인 이명박’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9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경선에 재도전하면서 최병렬 전 대표와 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이 후보는 그해 2월 의원직을 버리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후보의 의원직 사퇴로 치러진 종로구 보궐선거에선 국민회의의 노무현 후보가 한나라당의 정인봉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 국회에 재입성하는 발판을 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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