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 조진웅 이제훈 주연의 tvN '시그널'이 흥행, 연기력, 화제성 세 마리 토끼를 잡았다.ⓒtvN
"20년이 지났는데 거긴 달라졌겠죠?"
tvN 금토드라마 '시그널'이 던지는 화두다.
장르물, 독특한 소재 탓에 출연을 망설였다는 조진웅의 마음을 돌린 것도 이 대사다. 드라마는 현재의 형사들과 과거의 형사가 낡은 무전기로 교감을 나누며 장기 미제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를 다룬 장르물이다.
장르 특성상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할 것이라는 우려를 깨고 시청률 10%(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가구 기준)를 돌파하며 종영을 앞두고 있다.
'시그널'이 다루는 사건, 사고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 사회를 흔들었던 사건, 사고들이 나오면서 대한민국의 민낯을 드러낸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시그널'이 다룬 사건들
가장 처음 선보인 사건은 '김윤정 유괴 사건'이다. 드라마 속 경찰은 진범을 잡고도 공소시효 만료로 그를 처벌하지 못한다. 여론이 들끓자 국회는 살인죄 공소시효를 폐지하고 이후 차수현(김혜수), 박해영(이제훈) 등이 뭉쳐 장기미제수사전담팀이 만들어진다.
이 사건은 1997년 실제로 있었던 한 초등학생의 유괴사건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지난해 7월 국회를 통과한 '태완이법'(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을 떠올리게 했다.
장기미제수사팀이 첫 번째로 맡아 수사한 1989년 경기 남부 사건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1986년부터 5년간 10명의 부녀자가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 채 미제로 남아 있다.
'시그널'에선 박해영과 과거의 이재한 형사(조진웅)가 무전기 공조 수사를 벌이면서 범인을 잡는다. 범인이 붙잡히자 현재도 달라졌다. 드라마가 아닌 실제 현실에선 '영구 미제'로 남은 사건이 풀리자 시청자들은 통쾌함을 맛봤다.
김혜수 조진웅 이제훈 주연의 tvN '시그널'은 현재의 형사들과 과거의 형사가 낡은 무전기로 교감을 나누며 장기 미제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를 다룬 장르물이다.ⓒtvN
세 번째는 대도 사건(1995)과 한영대교 붕괴 사고다. 1970~1980년대 부유층만을 대상으로 도둑질을 한 '대도 조세형'과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떠올리게 했다. 무고한 시민 32명이 숨진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당시의 슬픔과 충격을 전달해 안방극장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네 번째 다룬 홍원동 사건(1997)은 2005년 서울 신정동에서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을 연상시킨다. 두 명의 여성이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으로 지난해 10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뤄져 큰 파장을 낳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범인은 잡혔지만 신정동 살인사건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최근 가장 화두가 된 사건은 인주 여고생 사건(1999)이다. 인주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여고생 집단 성폭행 사건으로 극 중 박해영의 형, 이재한 형사의 죽음과 관련돼 드라마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해영의 형 선우는 억울하게 진범으로 몰렸고 이후 자살을 위장한 타살을 당한다.
선우의 결백을 믿어주는 사람은 이재한 형사뿐이다. 여고생 역시 남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거짓말을 한다.
드라마 속 사건은 2004년 경남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과 닮은꼴이다.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는 점, 피해자가 더 큰 고통을 받는다는 점, 성폭행 사건은 공소시효 폐지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은 시청자들의 공분을 샀다.
정의·희생을 보여준 드라마
드라마 방송 전 김원석 PD는 "드라마가 다루는 에피소드는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는데 범인을 잡는 이야기라 시청자들이 좋아할 듯하다"고 밝힌 바 있다. '고구마'(답답하다는 뜻) 같은 현실에 지친 시청자들에게 '시그널'은 '사이다'(속이 뻥 뚫린 것 같은 시원함)가 된 셈이다.
완전 범죄는 없고 죄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희생자들의 울부짖음은 과거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고,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드물다.
김혜수 조진웅 이제훈 주연의 tvN '시그널'은 장르물이라는 한계를 딛고 시청률 10%를 돌파했다.ⓒtvN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고통받는 사회, '있는 자들'과 '가진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법망을 빠져나가는 사회에서 국민들은 누굴 믿고 살아야 할까.
경찰, 검찰, 정치권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요즘, '시그널'은 그래도 정의를 바로 세우는 사람은 있다는 희망을 길어 올린다. 차수현, 박해영, 이재한 형사를 통해서 말이다.
20년 동안 한 사람을 기다린 수현, 형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경찰이 된 해영, 진실을 찾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재한은 어쩌면 요즘 시대에선 보기 드문 사람들이다.
좀 더 쉬운 길을 가기 위해 갖은 술수를 꾀하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까 궁리만 하는 사람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에 익숙한 우리에게 '시그널'은 정의와 희생으로 똘똘 뭉친 '판타지'를 선사한다.
"제발 좀 내 얘기를 들어달라", "범인 좀 잡아달라"는 얘기를 세 사람에게 하고 싶을 정도다. 이들이라면 억울한 내 사연도 들어줄 것만 같고, 뭔가 해결해줄 것만 같다. 의심이 아닌 확신이 든다.
드라마는 진심이 꾹꾹 담긴 대사를 통해서도 메시지를 전한다. "누군가는 잊지 말아야죠. 그 죽음도 난 기억할 겁니다", "미제 사건은 내 가족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왜 죽었는지조차 모르니까 잊을 수가 없는 거야. 하루하루가 지옥이지", "유가족들이 흘린 눈물은 바다 같을 거다. 죽을 각오로 범인을 찾아내서 수갑을 채우는 게 우리 일이다" 등이 그렇다.
너무나 현실 같아서 마음 아프지만 '시그널'을 통해 희망을 봤다고 시청자들은 말했다. 한 시청자는 "'시그널'이 현실 같아서 먹먹하다. 현실은 그럴지라도 드라마에선 해피엔딩을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죄지은 사람이 벌 받고 죗값 받아야 하는데 왜 안 되냐, 20년 뒤 거기도 이럽니까?"라는 대사에 참담했다는 한 시청자는 "20년이 흘렀어도 변함없이 똑같은 세상...약자들에게 바치는 작가와 감독의 헌정 드라마"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시청자는 극 중 조진웅의 대사를 빌려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20년 후엔 뭐라도 좀 달라져 있겠죠? 희망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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