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퇴락하고 잊혀져 지금은 쓸쓸한 흔적만
추풍령, 계립령과 함께 영남대로의 3대 관문인 죽령은 2천여년 전 신라 아달라왕(158)때 뚫었다. 이 일대는 영남과 충청, 강원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삼국시대부터 혈전의 무대였다. 해발 600m터가 넘는 험준한 죽령을 차지하는 세력이 영남과 한강북쪽의 영토를 가장 빨리 차지하기 때문이었다.
죽령은 경북영주에서 단양을 거쳐 서울까지 5번국도·중앙선철도·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될 만큼 남쪽과 북쪽지역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즉 예나 지금이나 국방, 경제 등 모든 산업의 운송이 오갈 갈 정도로 변함이 없는 곳이다.
이 고갯길을 한눈에 감시하는 봉우리에는 쟁탈의 상징인 산성과 봉수가 곳곳에 축조돼 있다. 대부분 신라가 북진할 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산간오지 중 개발되지 않은 곳에는 지금도 그 시대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병풍처럼 가로막은 죽령을 넘어 죽령산성을 지나 단양방향의 용부원산성, 공문산성, 적성산성 등 1500년 전의 요새가 3km 남짓한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다. 이중에서 한 번도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는 공문산성과 적의 동태를 관찰하던 봉수대가 있다. 봉수의 위치는 대강면사무소 맞은편 죽령천 건너 두음리 등골마을 뒷산이다.
성재(36m)로 부르는 이곳은 죽령과 계립령에서 넘어오는 길이 합류하는 삼각지점이다. 봉수가 설치된 산 정상에는 내성과 외성의 석축산성이 있는데, 내성둘레는 약 500m, 외성은 800m 정도다. 성벽은 죽령천변의 사람머리만한 돌을 가져다 쌓았는데 세월의 더께를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붕괴됐다.
산성의 총 길이는 약1300m, 성벽높이는 대부분 무너져 확인이 어렵다. 쏟아진 돌무더기를 볼 때 높은 곳은 3m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에는 우물터가 4곳에 있으며 서쪽에 옹성형태의 성문이 남아 있다. 성내의 경작지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 편과 기와 편들이 발견된다. 산성아래는 드넓은 토지가 있는데 주민들이 밭농사를 짓고 있다.
봉수는 내성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다. 봉홧불을 올리던 핵심연대와 30m 떨어진 평탄지에 는 4개의 연통시설이 흙더미에 묻혀있다. 연통간의 거리는 약 5m 정도다. 연대는 밑 둘레가 약 22m, 위로 갈수록 좁아지며 상부 둘레는 7m 정도다.
봉수에 올라서면 죽령방향의 신기봉수, 용부원봉수 북쪽의 소이산봉수까지 조망된다. 특히 죽령에서 공문산성 사이에는 보루형태의 산성과 봉수가 짧은 거리를 두고 쌓여있는데, 이는 죽령일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발생하자 시야확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봉수는 삼국시대 때 산성자체에서 필요에 따라 설치한 권설봉수로 추정된다.
공문이라 명칭은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공문성(貢文城)으로 불렀으며, 문헌에는 1909년 일제 때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한번 등장하는데 공문(公文)으로 기록돼 있다. 토착민들은 공문이라는 이름도 구전으로만 전해질뿐 지금은 잊혀지고 성재로 부른다고 했다.
공문봉수 북쪽에는 적성산성이 빤히 보이는데 마을사람들은 옛 부터 적성을 큰집, 공문산성은 작은집으로 부르고 있다. 예천방향 남쪽 7km 거리에는 신라의 대규모 산성인 도락산성이 있다. 봉수대는 가는 길은 두음마을(등골)에서 북쪽 당동리로 넘는 옛길 성재로 가야하는데, 성 아래까지 자동차가 진입할 수 있지만 등산로가 개설되지 않아 접근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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