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범수용소는 모순덩어리 북한의 축소판"

김해원 기자 (lemir0505@dailian.co.kr)

입력 2012.09.21 18:49  수정

북한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 수용소 생존자 증언대회

요덕수용소 생존자 "군부대로 위장 발설 금지로 주민들 실상 몰라"

북한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대표 김태진)은 21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북한정치범수용소 생존자 증언대회’를 열고 참혹했던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북한인권의 달’을 맞아 북한 당국이 부정하고 있는 정치범수용소에서 생명과 인권을 위협받으며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대회가 열렸다.

북한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대표 김태진)은 21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북한정치범수용소 생존자 증언대회’를 열고 참혹했던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지난 1997년부터 1년간 요덕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탈북인 장영걸씨는 러시아 무역성 담당자였다. 그는 러시아에서 김정일 일가의 비자금 조성을 위한 외화벌이 업무를 했고 5년이상 매년 계획량인 100만 달러가 넘자 북한에서 갑작스러운 출장 명령을 받았다. 그는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초대소인 117호 섬으로 끌려갔다.

장 씨는“내가 끌려간 이유는 ‘외화를 너무 잘 벌어서’였다”며 “당시 국가안전보위부 내부 방침 중 일 년에 백만 달러 이상을 버는 외화벌이 사업소를 잡아들여 조사를 한다는 방침이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전했다.

그는 “그들은 계획을 달성하는 외화벌이 사업소는 당연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고 전제를 하고 잡아들여 자신들이 정해놓은 죄를 실토할 때까지 모진 고문과 조사를 했다”며 “국가가 정해준 계획량을 초과 달성했다는 이유로 국익에 도움을 주는 인재들을 체포해 조사하다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 체제인가”라고 지적했다.

독방에 갇힌 채 ‘위대한 장군님의 배려로 사상 검토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성실하게 자기비판을 하라’는 북측의 요구에 따라 하루 종일 종이에 자기비판을 작성했다고 장 씨는 전했다.

그는 “사실상 그들이 원하는 바가 나오지 않자 나를 다른 초대소로 옮겼다”며 “세 군데의 초대소를 전전하고 예심국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예심국은 사실상 죽으러 들어가는 곳”이라며 “거의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데 나는 1년을 버텼다. 예심도중 사망하면 정치범으로 모함해 상부에 보고를 하기 때문에 버텼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1년 동안 4번의 예심을 받고 과오를 저질렀다는 뚜렷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자, 요덕수용소로 끌려가 노동교화 처벌을 받게 됐다.

그는 “요덕수용소에서 가장 많이 만들었던 것은 관 이었다”며 “관을 보면 키가 큰 사람이 죽었는지 작은 사람이 죽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수용소에서는 대부분 영양실조로 사망한다”며 “강냉이밥과 시래깃국에 소금을 넣은 배급만으로 영영실조에 걸려 버틸 수가 없어 보위원의 눈을 피해 뱀이나 개구리, 물고기 등을 잡아먹었다”고 말했다.

장 씨는 혁명화구역에 있던 정양소(요양소)를 설명하며 “몸이 약하고 병이 있는 사람이 한동안 쉬게 되어 있는 곳이었는데 실제로 수감자들이 정양소에서 요양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며 “보위부원들이 와서 쉬면 여성수감자들의 그들의 목욕물을 받아주고 비위를 맞춰준다”고 말했다.

그는 정보가 철저히 제한적인 북한에서, 당시 자신이 끌려갔던 곳이 요덕수용소인 것을 몰랐고 단지 요덕에 있는 군부대인 줄 알았다고 전했다.

북한 내에서는 정치범수용소가 군부대로 위장되어 있고 수용소에서 풀려나도 어떤 정보를 발설하지 못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도 실상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장 씨의 설명이다.

그는 “요덕 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재인 사람들 뿐 이었다”며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쳐 충성해야 할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돌아오는 것은 가혹한 요덕수용소행인 나라 그곳이 북한”이라고 강조했다.[데일리안 = 김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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