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가 천재를 죽이는 이유?

김헌식 문화평론가 (codessss@hanmail.net)

입력 2011.04.05 08:48  수정 2013.05.22 15:31

<김헌식 칼럼>교육공학도, 문화심리도 모두 놓치다

버지니아 출신의 장학생 존 내쉬(John F. Nash Jr.)는 프린스턴의 대학원 수업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학과장은 그가 창의적인 논문을 쓰자 출석이나 학점에 관계없이 박사과정을 졸업시킨다. 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의 인재들만 근무하는 윌러 연구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 물론 그는 윌러 연구소에서 활발하게 국가적 활동을 펼친다. 그가 쓴 박사논문은 나중에 노벨경제학상을 받게 한다.

아인슈타인은 대학 생활 내내 강의를 빠지기 일쑤였고, 특정 과목들은 낙제 수준이었다. 더구나 그에게 항상 노트를 정리해보는 친구가 있어서 그는 졸업을 할 수 있었고 직장을 얻은 뒤 연구에 몰입할수 있었다. 그 친구가 바로 그로스만(Marcel Grossmann)이었고, 그로스만은 나중에 상대성이론을 정립하는데 같이 작업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런 세계적인 천재를 길러낸다는 한국의 카이스트에서는 창의적인 학자를 길러내지 못할뿐만 아니라 같이 연구할 동료들을 적으로 만들고 있다. 최근에 연이은 자살 사건들은 카이스트의 이런 징후라고 보여진다.

그 원인을 두고 종교계에서는 영적인 황폐함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물론 영적인 충만함이 가득하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영적인 충만함은 삶을 긍정하는 방향에서 적절할 것이다. 다만, 어쩌면 그것은 한국인들이 모두 겪고 있는 바이기 때문에 카이스트에 해당되는 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카이스트가 2007년 시작한 제도의 영향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것은 징벌적 등록금제이다. 일반 대학교의 장학제도를 생각한다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일반 대학교에서도 특정기준의 학점을 넘지 못하면 장학금 혜택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드시 상대평가에서 누군가는 좋지 않은 학점을 받는다. 카이스트의 경우, 두학기 3.0의 평점을 넘지 못하면 0.01점당 6만원에 해당하는 등록금을 납입해야 한다. 모두 아무리 열심히 해도 15%의 학생은 이런 벌금형 등록금을 내야 한다. 내가 내지 않으려면 다른 누군가 즉 자신의 친구들을 그곳에 빠뜨려야 한다. 학생들의 동기부여는 바로 벌금 등록금제이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 징벌 등록금은 단순히 벌점을 맞거나 낙제를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서남표 총장은 간과했다.

그것은 한국의 사회문화적 요인을 간과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등록금이 한국에서 어떤 문화심리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했어야 한다. 등록금은 단순히 그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그들에게는 더 큰 상징 효과가 치명적으로 작용하기 쉽다.

우선 한국에서 등록금은 학생 자신이 온전히 마련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많은 경우 부모들이 마련한다. 학생이 낸다고 해도 빚을 지는 경우가 많고 온전히 학업에 매진하기보다는 알바 등 다른 수단을 모색해야 한다. 이럴 경우 학점이 나빠도 책망할만한 사안이 되지 않는다. 다른 일을 하느라그랬다는 변명이라도 세울 수 있다. 카이스트의 학생이 학자금을 자신이 토해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은 굉장한 충격이 된다. 이들은 공부만 해왔다. 더구나 공부만 해야 하기 때문에 이는 학생 자신의 경제적 부담이 아니라 학생 부모의 경제적 부담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액수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학비를 새삼 부모가 부담해야하는 것은 학생의 수치이면서 부모의 수치가 된다. 한국과 같이 주위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해야 하는 경우 학생들의 심리적 상처는 매우 강하다. 그것은 부모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만든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학생이 3등하는 것과 100등이 102등하는 것과는 그 영향관계는 개인에게 다른 심리적 현상을 낳는다. 어떤 학생들이 그러한 수치를 벗어나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만 문제는 누군가는 그러한 비참한 지경에 반드시 빠질 수밖에 없는 상대평가의 구조다. 이 때문에 많은 경우 수많은 학생들이 그러한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상처를 받게 된다.

자기효능감에 따른 몰입이 아니라 부정적 처벌을 통한 학습의 촉진이 과연 얼마나 창의적인 작업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인가 근본적인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는다는 유태인의 교육철학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유태인의 수치라고 여긴다. 한국인의 교육철학은 1등 하는 것, 아니 낮은 학점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 생각을 스스로 얼마나 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더구나 미적분을 영어로 얼마나 잘 알아듣는가만 중요하다. 영어구사라는 능력의 강조가 자기 소외와 연결되는 것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이러한 조치들이 개개인 학생들의 심리적 상태나 성격을 고려하지 않는 학습조치라는 것이다. 자존심을 자극하면 그것을 극복하여 더욱 잘하는 학생이 있지만, 더욱 악순환에 빠져버리는 학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즉, 이 때문에 징벌적 등록금제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 특히 카이스트 학생들은 어린 시절부터 항상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이들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런 학생들은 결코 혼자 존립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벌금형 등록금은 심각한 존재론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그것을 감안하여 교수학습 방식이 다듬어져 실행되어야 한다.

더구나 정말 비극적인 것은 그들이 수행해야 하는 과업들이 정말 폭력적인 조치들과 교환할만한 것들이냐는 것이다. 내쉬는 학교수업이 창조력을 해친다며 수업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적어도 가장 창의력을 통해 신기원을 이루어야 하는 학생들에게 학점의 틀로 상대적으로 서열화하는 것은 맞지 않다. 더구나 수단이 목적을 합리화하는 교육방식은 그 효과와 관계없이 인간의 영혼과 지성을 훼손시킨다. 인간의 영혼과 지성을 수단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많은 학생들은 아직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학업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 정점에 카이스트가 있다.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학교에 다니는 그러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방치된다.

장기적으로 중요하며 꼭 필요한 소양은 창조적인 연구능력의 함양이다. 이러한 능력에는 인지적 지능 보다 정서적 지능 차원의 접근도 매우 중요하다. 학생들은 컴퓨터 기계가 아니라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장학금 제도는 훌륭한 학자와 연구자를 만들기 위해 학생들이 학비 걱정하지 않고 학업에 충실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학업은 당장의 단기적인 학점으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한다. 오랜 동안 자기주도적이고 능동적인 학업 성취가 이루어져야 한다. 공자는 공부에서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고 했다.(子曰 ; 知之者 , 不如好之者 . 好之者 , 不如樂之者) 말콤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에서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고 했다. 그는 1만시간이라는 절대량을 말하기도 했다. 특정 시간이 이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으며 이는 천재적인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로봇 영재의 불행한 일을 생각할 때 만약 징벌적 등록금 제도와 같은 무도한 제도가 앞으로 오랜 기간 동안 창의적인 작업을 하려는 희망과 의지를 꺾어버리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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