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우협 선정 후 반년 넘게 협상 지속
웨이퍼 가치 재평가에 매각 신중론 부상
최창원식 리밸런싱·최태원 AI 전략 맞물려
서울 서린동SK사옥 전경.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SK실트론 매각을 둘러싼 SK그룹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지난해 말 두산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며 매각 절차에 속도를 내는 듯했지만, 인공지능(AI) 반도체 호황이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웨이퍼를 생산하는 SK실트론의 전략적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리밸런싱과 AI 반도체 밸류체인 강화 사이에서 고심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SK㈜는 지난해 12월 두산그룹을 SK실트론 지분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뒤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 매각 대상은 SK㈜가 보유한 SK실트론 지분 70.6%다. 당시 시장에서는 SK실트론의 전체 기업가치를 약 5조원 수준으로 평가했으며, 실제 거래 규모는 3조~4조원대가 될 것으로 추산됐다.
그러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 반년 넘게 본계약 체결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매각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다. 표면적으로는 두산 측과 매각가 및 세부 조건을 둘러싼 이견 조율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SK 측도 매각 무산으로 보는 시각에는 선을 긋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SK그룹 내부의 판단 기준은 달라지고 있다.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중심으로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밸류체인 전반의 전략적 가치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SK실트론은 반도체 기판인 실리콘 웨이퍼를 생산하는 회사로, 12인치 웨이퍼 기준 글로벌 시장 점유율 3위권 업체다. SK하이닉스가 AI 메모리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상황에서 웨이퍼 공급망을 그룹 내부에 둘 필요성이 과거보다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강조하고 있는 'AI 풀스택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최 회장은 최근 메모리와 데이터센터 인프라, 에너지·전력 인프라 등 AI 시대에 필요한 밸류체인을 SK그룹이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SK실트론은 단순한 매각 자산이 아니라 AI 반도체 가치사슬을 구성하는 핵심 소재 자산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사회 변수도 매각 장기화의 배경으로 거론된다. 최근 SK㈜ 이사회 차원의 검토 과정에서 사외이사들이 매각에 신중한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단기적인 차입 부담 완화보다 AI 반도체 호황 국면에서 웨이퍼 공급망을 그룹 내부에 보유하는 효과가 더 크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SK㈜ 이사회는 사외이사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이들의 신중론이 이어질 경우 매각 안건 통과도 쉽지 않다. 업계에서는 두산과의 거래를 마무리하려면 최태원 회장의 판단과 설득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는 관측도 나온다. 반대로 최 회장이 AI 반도체 밸류체인 강화를 우선할 경우 SK실트론 매각은 장기 표류하거나 재검토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SK실트론 매각은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주도해온 그룹 리밸런싱의 대표적인 진행 건으로 꼽혀왔다. SK그룹은 그동안 재무구조 개선과 포트폴리오 재편을 위해 비핵심 자산 매각을 추진해왔다. SK실트론 역시 이 같은 흐름 속에서 매각 대상에 오른 것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반도체 소재 자산 매각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AI 반도체 랠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SK실트론을 매각할 경우 향후 웨이퍼 수급과 비용 측면에서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과거 SK에코플랜트가 보유했던 블룸에너지 지분 매각이 '헐값 매각'의 대표적 사례가 되면서 이번 SK실트론 매각이 더욱 신중해졌다는 관측도 크다.
SK그룹이 전통적으로 수직계열화를 중시해왔다는 점도 매각 신중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반도체 호황기마다 웨이퍼 수급이 변수로 작용해온 만큼, 핵심 소재사를 그룹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는 데 대한 전략적 부담이 작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SK하이닉스가 HBM과 선단 메모리를 중심으로 투자를 확대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웨이퍼 공급망 확보는 중장기 경쟁력과 직결된다.
다만 매각을 철회하는 것도 부담이다. SK㈜는 공식 입찰 절차를 거쳐 두산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고, 양측은 상당 기간 실사와 가격 협상을 진행해왔다. 시장 상황 변화만을 이유로 거래를 접을 경우 자본시장 신뢰에 부담이 될 수 있다. 두산 역시 반도체 테스트 기업 두산테스나 등을 중심으로 반도체 사업 확대를 추진해온 만큼, SK실트론 인수는 그룹 사업 재편의 핵심 카드로 여겨져 왔다.
SK실트론 매각 장기화는 단순한 가격 협상 문제를 넘어 SK그룹 리밸런싱의 방향성을 가늠하는 사안이 됐다. 매각을 마무리하면 재무구조 개선과 사업 재편의 속도를 이어갈 수 있지만, AI 반도체 밸류체인의 핵심 소재 자산을 잃게 된다. 반대로 매각을 멈추면 전략 자산은 지킬 수 있지만, 그동안 추진해온 리밸런싱의 일관성과 시장 신뢰에는 부담이 생길 수 있다.
다만 재무구조 개선 측면에서 매각 필요성은 여전하다. SK실트론의 영업이익은 2024년 3155억원에서 2025년 1931억원으로 줄었고, 올해 1분기에도 88억원에 그쳤다. 총차입금은 2022년 약 1조9000억원에서 올해 3월 말 기준 3조855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SK㈜ 역시 올해 1분기 기준 순차입금이 약 7조3000억원 수준인 만큼, SK실트론 매각 대금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 유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재계에서는 SK실트론 매각 장기화 자체가 SK그룹 리밸런싱 기조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매각 여부를 예단하긴 어렵지만, 실트론 논의가 길어지는 것만으로도 과거처럼 재무 개선만을 앞세우기 어려워졌다는 의미가 있다"며 "AI 반도체 밸류체인 확보가 그룹의 주요 판단 기준으로 떠오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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