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철학부터 태극 문양까지
32년을 잇는 브랜드 컨설팅의 역사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순으로 삼성, SK, LG, 대한항공, 현대자동차 CI.ⓒ각 사
삼성의 '삼성블루'를 만든 회사가 32년 뒤 대한항공의 새 얼굴도 디자인했다. 기업 로고를 따라가면 창업주의 철학은 물론, 글로벌 전략과 시대의 변화까지 읽힌다.
삼성, 별표국수에서 우주 상징하는 파란 타원으로
삼성의 시작은 1938년 이병철 창업주가 대구에 내건 '삼성상회' 간판이었다. 당시 국수 브랜드로 쓰던 이름은 '별표'. 1965년 원형 로고를 거쳐 1993년 3월 뉴욕의 디자인사 L&M에 20억원을 들여 의뢰한 파란 타원형 로고가 도입됐다. 낯선 디자인에 사내 반발도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해 6월 이건희 회장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새 CI 역시 삼성의 글로벌화를 상징하는 변화로 자리 잡았다. 팬톤 286C 컬러의 이 '삼성블루'는 지금도 그대로다. 다만 이 타원 자체는 2015년부터 마케팅에서 문자 로고(SAMSUNG) 중심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SK, '가라앉는 젊음'에서 '행복날개'로
SK의 전신인 선경그룹은 1997년까지 '선경' 로고를 썼다. 당시 브랜드 검토 과정에서는 영문 표기가 'Sunk Young(가라앉는 젊음)'으로 읽힐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결국 1998년 사명을 'SK'로 바꿨는데, 삼성의 CI를 맡았던 L&M이 SUNEX·SUPEX 등을 포함한 10여 개 후보 가운데 제안한 이름이었다. 이후 2005년 '행복경영' 이념에 맞춰 지금의 빨강·주황 두 날개 로고 '행복날개'를 도입했다. 간판 교체에만 2~3년간 1200억원이 투입됐고 2020년부터는 색상이 10가지로 확대됐다.
현대차, 악수하는 두 사람이 숨어 있는 로고
1946년 정주영 창업주가 세운 현대자동차공업사에서 출발한 현대차는 1992년 그랜저 2세대부터 지금의 'H' 마크를 적용하기 시작해 1993년부터 표준 로고로 자리 잡았다. 현대차 측 설명에 따르면 이 H는 고객과 기업이 마주 보고 악수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고, 타원은 세계 무대를 겨냥한 현대차를 상징한다. 미국 뉴욕 데일리뉴스는 2015년 이를 소개하며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로고를 가진 현대차'라고 표현했다. 2009년에는 슈퍼볼 광고에서 배우 제프 브리지스의 내레이션으로 "현데이 라이크 선데이(Hyundai like Sunday)"라는 문구를 반복하며 영문 사명(Hyundai)의 발음법을 알리는 역발상 마케팅을 펼쳤다.
LG, '럭키크림'에서 '미래의 얼굴'까지
1947년 구인회 창업주가 세운 락희화학공업의 첫 히트작은 국산 최초 화장크림 '럭키크림'이었다. 이 성공으로 회사 이름도 '럭키(락희)'가 됐고, 1958년 설립된 금성사와 합쳐지며 'L'과 'G'를 딴 지금의 사명 'LG'가 1995년 탄생했다. 같은 해 1월 1일 신문 1면 하단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원형 마크만 실려 화제를 모았고, 나흘 뒤에야 새 LG 로고임이 공개됐다. 신라시대 기와 문양에서 영감을 얻은 이 '미래의 얼굴'은 성공적인 리브랜딩 사례로 꼽힌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지난해 3월 11일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신규 CI 론칭 행사에서 대한항공 신규 CI를 발표하고 있다.ⓒ대한항공
2025년, 41년 만의 변화...대한항공
가장 최근 사례는 대한항공이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3월 11일 서울 강서구 본사 격납고에서 '라이징 나이트' 행사를 열고, 1984년 도입한 CI를 41년 만에 전면 개편했다. 이번 작업을 맡은 리핀코트(Lippincott)는 삼성전자·스타벅스·델타항공 등 글로벌 기업들의 CI를 만들어온 브랜드 컨설팅사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공개한 비하인드에 따르면 해외 디자이너가 처음 제시한 시안에는 태극 문양 자체가 빠져 있었다고 한다. 조 회장은 대한민국 국적 항공사로서 태극무늬를 살려달라고 요청했고, 이 과정을 반복하느라 3년이 걸렸다고 밝혔다. 그렇게 살아남은 태극은 한국 전통 상모놀이에서 상모꾼의 긴 띠가 그리는 움직임에서 영감을 얻어 재해석됐다. 빨강·파랑 두 색이던 태극은 '대한항공 다크 블루' 단색으로 다듬었다. 이와 함께 대한항공은 올해 3월 주주총회에서 60여년간 써온 영문 약칭 'KAL'을 정관에서 삭제하고, 항공편명에 쓰이는 코드 'KE'를 새 브랜드로 전면에 내세우기로 했다.
흥미로운 건 이 리핀코트가 1993년 삼성의 파란 타원형 로고와 1998년 SK의 사명 개명 작업을 맡았던 'L&M(Lippincott & Margulies)'의 계보를 잇는 곳이라는 점이다. L&M은 2003년 Mercer와 통합돼 'Lippincott Mercer'가 됐다가, 2007년부터 다시 'Lippincott'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1993년 삼성에서 1998년 SK, 2025년 대한항공. 시대는 바뀌었지만 한국 대표 기업의 얼굴을 그린 브랜드 컨설팅 회사의 계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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