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 우회로만이 살길…살아남는 자가 强者 [판 뒤집힌 물류망②]

장정욱 기자 (cju@dailian.co.kr)

입력 2026.06.10 06:00  수정 2026.06.10 06:00

전후 세계 경제 ‘협력’보단 ‘자립’으로

안보 물품, 국가 전략 자산화 강화

지역·국가별 공급망, 중첩 구조화로

전쟁, 각자도생 물류시대 서막 열어

컨테이너선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전쟁 이전 세계 경제는 상호 의존을 기반으로 움직였다. 한 나라가 원자재를 공급하고, 다른 나라가 생산하며, 또 다른 나라가 소비하는 구조였다. 그런 구조는 비용을 낮추고 효율성을 높였다.


미국과 이런의 전쟁은 이러한 믿음을 무너뜨렸다. 언제든지 특정 국가가 수출을 제한하고, 특정 해역을 봉쇄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동맹국조차 자국 이익을 위해 움직일 수 있다는 현실을 확인시켰다.


그 결과 전후(戰後) 세계는 통합보다 분절, 협력보다 자립을 우선하는 새로운 물류 질서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국가와 기업 모두 ‘각자도생’ 체제 구축에 나선 것이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선진국이다. 과거 글로벌 무역은 자유무역협정(FTA)과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중심으로 굴러갔다. 공급망은 국경을 초월해 연결됐다. 기업들은 가장 저렴한 생산지를 찾아 움직였다. 국경은 크게 의미 없었다.


최근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각국 정부는 지정학적 위험을 이유로 전략물자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선진국일수록 더 강하고 빠르게 대응했다. 반도체와 배터리, 희토류, 에너지 자원 등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품목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활용됐다.


유럽은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공급선을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 역시 핵심 원자재 확보를 위해 동남아시아와 호주, 인도와의 협력을 확대 중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중심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독자적인 경제권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수년간 중국이 중동과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과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배경에도 공급망 안정성 확보라는 목적이 자리하고 있다.


결국 국가들은 과거처럼 하나의 공급망에 연결되는 대신 복수의 거래 상대국과 우회 경로를 확보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효율성보다 생존 가능성이 중요해진 것이다.


홍준표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과거에는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 세계를 하나의 생산망으로 묶는 ‘글로벌 최적화’ 전략이 지배적이었다면 지금은 다르다”며 “기업들은 생산과 공급망을 지역별로 분산시키면서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미국 물량은 미국에서, 중국은 중국에서, 유럽은 유럽에서 생산하는 구조가 확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업들의 변화는 더욱더 극적이다. 과거 기업들은 물류를 비용으로만 인식했다. 생산과 판매가 핵심이었다. 물류는 이를 지원하는 기능에 불과했다. 전쟁 이후 물류는 기업 생존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변모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체 물류망 구축이다. 글로벌 전자상거래 기업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물류센터와 배송망을 직접 운영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최근에는 제조업체들까지도 자체 창고와 운송망, 물류 데이터 플랫폼 구축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물류를 외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면 예상치 못한 공급망 충격에 노출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경기 평택항에 수출입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모습.ⓒ뉴시스
서로 다른 공급망 바탕 ‘그룹’ 형성


특히 최근 기업들은 단순한 재고 최소화 전략에서 벗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적시 생산(JIT·Just In Time)’이 표준이었다. 이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재고를 확보하는 ‘저스트 인 케이스(Just In Case)’ 전략이 확산하고 있다. 효율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위기 상황에서 생산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변화는 결국 세계 물류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과거에는 하나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세계를 연결했다면, 앞으로는 지역·국가별 공급망이 중첩된 다층 구조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물류 전문가들은 이를 ‘공급망 블록화’ 현상으로 설명한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국가들이 서로 다른 공급망 그룹을 형성하는 것이다. 냉전 시대 군사 동맹이 존재했다면 앞으로는 공급망 동맹이 국제 질서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번 전쟁은 에너지 시장에도 구조적 변화를 남기고 있다. 특히 수십 년 동안 유지돼 온 ‘중동 중심 석유 질서’가 점차 약화하는 모습이다.


그동안 세계 에너지 시장은 중동 산유국이 공급하고 미국과 유럽, 아시아가 소비하는 구조였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부각하면서 각국은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가장 큰 수혜자는 전쟁을 일으킨 미국이다. 미국은 셰일 혁명을 통해 세계 최대 산유국 반열에 오른 데 이어 최근에는 에너지 수출국으로서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고 있다.


남미 역시 새로운 에너지 공급지로 부상하고 있다. 브라질과 가이아나, 아르헨티나 등은 풍부한 석유·가스 자원을 바탕으로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중국도 에너지 권력 재편의 중요한 축이다. 비록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지만, 태양광과 풍력, 전기차 배터리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며 새로운 에너지 질서의 중심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쟁 이후 세계는 단순히 물류 경로만 바뀌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 간 신뢰를 기반으로 형성됐던 기존 공급망 체계가 해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우회로를 만들고 있다. 기업들은 독자적인 물류 역량 확보에 나서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약 70년간 세계를 하나로 묶었던 시대, 즉 ‘세계화’가 저물고 있다. 앞으로의 경쟁은 누가 더 강하게 연결됐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각자도생’의 물류 시대는 이제 서막이 열린다. 살아남는 자가 강자가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홍준표 위원은 “이 과정에서 기업들은 하나의 세계가 아닌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가정한다. 무역이 유지되지만 재편되는 ‘분산된 세계’와 블록화가 심화하는 ‘분절된 세계’”라며 “어느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더라도 대응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 전략이다. 하나의 전망에 베팅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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