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버드나무처럼, 주어진 환경에 유연하게 반응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에너지. 매일 반복하고 축적해 온 성실함으로 스스로 빛을 내는 이 집요한 시간들은 이름의 온도를 더 뜨겁게 만든다. 지금 유태양이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로저는, 그가 그간 쌓아온 단단한 태도가 고스란히 투영된 결과다.
뮤지컬 ‘렌트’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La Bohème)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199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모여 사는 젊은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을 그려낸다. 창작자 조나단 라슨이 직접 경험한 시대의 불안과 열정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부터 젊은 세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청춘을 대변하는 뮤지컬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도 2000년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아온 ‘렌트’는 올해로 10번째 시즌을 맞으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서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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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오늘을 버텨내는 청춘들의 분투는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는 울림을 주기 마련이다. 누군가 휘청일 때 기꺼이 곁을 지키는 존재가 되어주고, 예술과 기록을 통해 삶의 증거를 남기는 이들의 모습은 처연하면서도 아름답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그들이 자유로운 삶을 노래할 수 있었던 건, 생이란 결국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 쓰는 시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부채인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가치가 그들을 다시 일어서게 한다.
이 비극적이면서도 찬란한 세계관 속에서 유태양은 로저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로저는 연인을 잃은 슬픔과 병마라는 절망 속에서도 세상에 남길 단 한 곡의 노래를 갈망하는 인물이다. 유태양에게 로저는 완성된 정답을 보여주는 인물이 아니라, 매 순간 함께 흔들리며 예술가로서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존재에 가깝다.
“로저는 끊임없이 새로운 걸 저한테 알려주는 친구 같아요. 공연을 할 때마다 뭔가 새롭게 느끼게 해주고, 그래서 매일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최근에 배운 건 아주 명확해요. 로저가 마크나 다른 인물들과 어떤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내가 이 말을 뱉으면서 정말 이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그걸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 고민은 자연스럽게 인물 간의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크와의 갈등 장면은 그 고민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다.
“마크랑 2막에 크게 다투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에서 ‘내가 이 친구를 정말 사랑하니까 이만큼 화가 나는 걸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어요. 화가 날 만큼 이 관계가 중요한가 계속 고민했어요. 형들한테 ‘나한테 더 이야기해 줄 수 있겠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그게 진짜로 나한테 전달되게, 나를 더 봐주면서 에너지를 더 줘달라는 말이더라고요. 그래서 연기적으로 요즘은 그런 부분들을 더 생각하게 돼요.”
로저라는 이름이 유태양에게 처음 닿은 건 2023년이었다. 당시 배우 김호영의 권유로 오디션에 참여했고, 연출진 역시 그의 가능성을 눈여겨봤다. 하지만 결과를 현실로 옮기기까지는 넘지 못한 벽이 있었다. 그룹 활동 일정과 맞물리며 무대 합류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2023년 시즌 때 팀 컴백 주랑 겹쳐 있었어요. 새벽에는 음악 방송 녹화를 하고, 아침에는 오디션을 보러 갔죠. 너무 하고 싶었던 작품이었거든요. 그런데 회사 스케줄이랑 조율이 잘 안돼서 결국 성사가 안 됐어요. 그래서 다음 시즌에는 무조건 다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번 오디션도 그룹 활동 시기와 겹쳤는데, 첫 오디션을 보고 연출님께서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회사에 오디션을 꼭 보고 싶다고, 스케줄을 조정해달라고 부탁드렸죠. 그만큼 꼭 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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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장르에 걸맞게 노래를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대본을 파고들수록, 중요해진 건 테크닉이 아니었다. 그는 한 소절을 부르기 위해 로저의 삶 전체를 되짚는 쪽을 택했다. 노래의 완성도보다, 로저가 왜 이 장면에 서 있는지를 관객이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노래를 하기까지의 과정, 로저와 다른 인물들의 관계성, 감정이 먼저 자리 잡혀야 노래도 의미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공연 전에 로저가 어디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어땠고 등 기존 자료에 제가 해석을 더한 전사를 다시 읽어요. 그런 걸 다시 확인하고 들어가면 집중력과 에너지가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로저에 이입하기 위한 유태양의 선택은 무대 위 디테일에서 구체화된다. 손가락에 새긴 타투부터 투박하게 칠해진 검은 네일아트까지, 그가 선택한 외적인 장치들은 단순한 스타일링을 넘어 캐릭터의 아픈 과거와 음악적 열망을 증명하는 매개체가 된다. 무엇보다 그는 무대 위에서 실제로 기타를 연주하며, 시즌을 통틀어 실연을 선택한 전무후무한 로저로 무대에 선다.
“브로드웨이에서 로저 역을 맡았던 배우도 공연 당시 손에 타투를 했던 걸 영상으로 봤는데, 글자가 희미해서 처음에는 정확히 읽히지 않았어요. 시간이 지나 혼자 공연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가, 문득 그 글자가 무엇인지 알겠더라고요. 로저의 전 연인인 에이프릴이었어요. 저는 에이프릴이 로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이름을 손에 새기고 무대에 올라요. 이 타투가 공연할 때 실제로 큰 힘이 되거든요. 제가 직접 검은색으로 칠한 네일아트도요. 기타를 칠 때 이 네일아트가 보이면, ‘아, 이 사람은 음악을 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지’라는 감정이 다시 올라와요. 기타도 마찬가지예요. 핸드 싱크랑 실제 연주는 완전히 다르거든요. 지금은 직접 치지 않는 구간에서도 손은 계속 연주하고 있어요. 그게 오히려 저를 로저에 더 가깝게 만들어준다고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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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트’ 속 유태양의 그의 창법은 이전과는 다른 인상을 남겼다. 그 변화에 대해 묻자, 유태양은 창법을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렌트’는 제가 안 해본 창법이에요. 연출님이랑 연습하면서 ‘이 소리를 어떻게 낼까’보다 ‘이 질문을 어디서 던지는 인물인가’를 먼저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원 송 글로리’(One song glory)도 ‘내가 남길 노래는 내 안에 있는 건지, 밖에서 찾는 건지’를 먼저 생각하니까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바뀌더라고요.”
뮤지컬 무대에서 쌓은 경험은 이후 SF9 활동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그룹 활동을 할 때는 미처 몰랐던 '노래의 무게'를 무대 위에서 홀로 서사를 책임지며 깨닫게 된 것이다. 한 곡을 온전히 이끌어가기 위한 가창적 훈련은 그에게 기술적인 수월함을 선물했지만, 더 큰 수확은 따로 있었다.
“가장 크게 체감되는 건 가창적인 부분이에요. 뮤지컬은 파트를 나눠서 부르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감정과 노래를 전부 책임져야 하잖아요. 그걸 감당하기 위한 훈련을 훨씬 많이 하다 보니 다시 팀 활동으로 돌아왔을 때, 가창적으로 훨씬 준비된 상태에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노래를 하는 게 전보다 수월해졌다는 체감이 빠르게 왔고요. 두 번째로 달라진 건 가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뮤지컬에서는 가사의 전달력을 굉장히 중요하게 보잖아요. 그 상태로 가요를 다시 하다 보니, 제 노래 가사도 다시 곱씹어 보게 되더라고요. ‘내가 이 가사를 정말 부르고 싶어서 부르고 있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다시 던지게 됐어요. 예전에는 연습을 많이 해서 정해진 대로 무대에 올라가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무대 위에서 ‘나는 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험을 했어요.”
유태양은 자신만의 노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로저의 모습에서 지금의 자신을 발견한다. 완벽한 정답을 내놓기보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방황하는 예술가의 숙명을 로저를 통해 투영하고 있는 셈이다. 목표에 닿지 않아 마음이 고단했던 시기를 지나, 여전히 무언가를 찾기 위해 길을 걷고 있다는 그에게서 로저의 뜨거운 갈증이 동시에 읽혔다.
“로저는 단 한 곡의 노래를 찾기 위해 갈등하는 인물인데, 요즘의 저도 그런 시기인 것 같아요. 아직은 찾고 있는 과정이에요. 언제 찾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감은 있어요. 물론 한동안 마음이 쉽지 않았던 시기도 있었어요. 뜻했던 대로 되지 않고, 목표치에 다다르려고 아무리 가도 손이 닿지 않는 느낌이어서 많이 힘들었거든요. 지금도 그런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지금은 다시 마음을 잡고 가고 있는 상태예요. 그래서 지금의 저는, 나만의 무언가를 찾기 위한 과정을 지나고 있다고 느껴요.”
무대 위 화려함 이면에는 늘 보이지 않는 치열한 스케줄 조율과 상황적 제약들이 존재한다. 팀 활동을 병행해야 하는 그에게 시간은 늘 부족한 자원이었을 터. 하지만 유태양은 그 제약마저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자신의 몫으로 돌리고 있었다.
“초반에 뮤지컬을 할 때는 스케줄 조율이 정말 스트레스로 다가왔어요. 최상의 컨디션으로 무대에 서고 싶은데, 왜 이렇게 뜻대로 안 될까 하는 아쉬움이 컸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조율이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감사함이 더 커졌어요. 스케줄 조율은 사실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그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게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그렇게 집중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잘하고 싶기 때문에 그만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 자리에 섰다면 그만치 책임을 다하는 게 당연한 거죠.”
주변에서는 그를 향해 ‘로저 그 자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유태양은 기분 좋은 평가에 안주하기보다 배우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데 집중하고 있다.
‘칭찬 너무 감사하지만, 스스로 조금 필터링해서 들으려고 해요. 내가 너무 만족하는 순간이 오면 마음이 흐트러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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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유태양은 매일 아침 짧은 기록으로 하루를 열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삶이 아니라 선택한 삶을 살고 싶다는 의지는 그 기록의 중심에 있었다. 지금은 방식이 달라졌다.
“지금은 운동하면서 마음가짐을 잡는 편이에요. 단순히 몸을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오늘 일어났고, 이것까지 해냈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도 잘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과정에 가까워요. 저한테는 그게 일종의 정신적인 준비 같은 거예요. 물론 수첩은 여전히 있어요. 어느 날 문득 기억하고 싶을 때, 남겨두고 싶은 감정이 있을 때는 적어요. 다만 예전처럼 아침마다 쓰지는 않아요. 수십 번, 수백 장을 써보니까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결국 내가 바뀌어야 하는 거구나 싶었죠. 글만 쓴다고 달라지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방식을 조금 바꿨어요. 꽤 만족하고 있어요.”
2021년 ‘알타보이즈’로 첫 무대에 선 이후 ‘은밀하게 위대하게’, ‘인간의 법정’, ‘삼총사’, ‘살리에르’, ‘블러디 러브’, ‘렌트’ 등 유태양은 쉼 없이 무대를 오가며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채워왔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인 시간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저는 항상 그 시기마다의 최선을 다해왔어요. 지금 와서 보면 아쉽게 느껴지는 것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아쉬운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만약 예전 무대를 다시 봤을 때 만족스럽다면, 그건 정체돼 있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뮤지컬 작품이 제가 원했던 만큼 나오지 못한 무대였다고 해도,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는 건 그때의 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출처 없는 자신감 같은 게 있어요. 나중에 보면 지금의 제 모습도 부족해 보이겠죠.(웃음)”
유태양이 새로운 장르인 뮤지컬에 빠르게 안착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타고난 감각 때문만은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조언이라면 무엇이든 빠르게 제 것으로 만드는 스펀지 같은 흡수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제 강점은 흡수가 빠르다는 거예요. 피드백을 주면 바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부정적인 말이어도 이유가 있다고 믿죠.”
유태양은 예정된 공연이 이어지는 내년 2월 말까지는 ‘렌트’에 모든 에너지를 쏟을 계획이다.
“일단 내년 2월 말까지 ‘렌트’ 공연이 예정돼 있어서, 내년 초까지는 이 작품에 최대한 집중하고 완전히 몰입할 계획이에요. 그 이후에는 팀 활동이든 뮤지컬이든, 지금보다 더 준비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그래서 보컬뿐 아니라 연기까지 포함해서 트레이닝을 더 많이 받고 싶어요. 실제로 지금도 여러 방향으로 알아보고 있고, 다양한 분들을 만나면서 준비를 이어가고 있어요.”
유태양에게 올해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변화한 해였다. 이전보다 냉정하게 자신을 대면하기 시작했다는 그는, 2025년을 성장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과정으로 정의했다.
“예전에는 나이에 기대서 ‘아직 시간은 있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올해는 저한테 책임감을 가르쳐 준 날들이었어요. 스스로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던 시간이었고, 꼭 필요했던 과정이었죠. 아직도 완전히 다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해였다는 건 분명해요.”
화려한 수식어보다 관객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닿고 싶다는 바람. 누군가에게 다시 보고 싶은 배우로 남는 것은 유태양이 매회 무대 위에서 되새기는 목표다.
“제 회차를 보신 분들이라면, 한 번 더 보고 싶어지는 로저였으면 좋겠어요. 공연을 한 번 보면 디테일까지 다 보이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생각나지?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라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걸로 충분히 감사할 것 같아요. 뮤지컬 배우로서는, 잘하고 멋있는 배우도 좋지만 그보다 ‘마음이 가는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관객이 저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더 열심히 하고 잘할 테니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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