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에 유가 껑충…'환율 상승 → 수출기업 유리' 공식은 옛말
원자재 수입 비중 커 부담 폭증…정유·철강·석화·항공업 등 타격
8월 18일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 야적장에 철강제품이 쌓여 있다. ⓒ뉴시스
원·달러 환율이 1500원 안팎에서 등락을 반복하고 국제 유가까지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국내 산업계 전반이 신음하고 있다. 과거 환율 상승이 수출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하던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원자재 수입 비중이 큰 산업 구조 속에서 고환율과 고유가가 동시에 발생하며 원가 부담이 폭증하고, 기업 경영 불확실성은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2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장 종가 대비 3.6원 내린 달러당 1472.0원에 개장했다. 올해 들어 원·달러 환율은 글로벌 달러 강세, 지정학적 리스크, 내국인의 해외투자에 따른 자금 유출 등으로 1400원대를 장기간 유지하다가 지난 21일 7개월 만에 최고치인 1475.6원으로 마감된 바 있다. 이런 추세라면 환율이 머지않아 1500원까지도 오를 수 있다.
고환율의 영향을 받아 유가도 천장이 뚫렸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국내 주유소 휘발유와 경유의 주간 평균 가격이 4주 연속 동반 상승했다. 이달 셋째 주(16~20일) 전국 주유소 휘발유 평균 판매가는 전주 대비 L당 25.8원 오른 1729.7원이었고, 이날 평균 판매가는 이보다 높은 1744.25원으로 기록됐다. 경유 역시 셋째 주 평균 1636.6원보다 높은 1658.95원에 거래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산업계는 환율이 오르면 수출 채산성이 개선되는 효과를 누려왔다. 그러나 글로벌 공급망과 원자재 의존도가 높아진 지금의 산업 구조에서는 고환율이 호재보다 악재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올해 초 주요 업종별 협회 12곳과 함께 실시한 '고환율 기조가 주요 산업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자동차·기계를 제외한 대다수 업종이 환율 상승 시 부정적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반도체 산업에서도 제조원가 상승과 해외 공장 투자비 증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환율이 오르면 수출 이익보다 원재료·운임·에너지 비용 상승이 더 크게 반영되는 '역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도 지난 4월 발표한 '2025년도 수출기업 금융애로 및 정책 금융 개선 과제' 보고서에서 "통상 환율이 상승하면 수출 채산성이 개선될 수 있지만, 동시에 원자재 구매 비용·운임 상승으로 높은 환율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협상력이 낮은 중소·중견 기업의 경우 수입 원부자재 비용이 증가하는 동시에 환율 상승을 이유로 바이어가 납품 단가 조정을 요청하는 이중고에 시달릴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23일 서울 시내 주유소에 유가 정보가 표시되어 있다. ⓒ뉴시스
고환율·고유가의 복합 충격은 원유·철광석·나프타 등 해외 자원 의존도가 높은 업종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정유업계는 고유가 국면에서 겉으로는 제품 가격이 오르며 매출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유 도입 비용과 재고 부담이 커지면서 정제마진 변동성이 급격히 확대되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한다. 정유사는 원유를 구매해 정제한 뒤 일정 기간 후 판매하는 구조인데, 유가가 급등하면 고가에 도입한 원유가 제때 매출로 전환되지 못해 재고 손실 가능성이 커진다. 고환율까지 더해지면 원유 수입 대금 자체가 늘어나, 유가 상승분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실제 SK이노베이션은 최근 분기보고서를 통해 3분기 말 대비 환율이 10% 오를 시 법인세 차감 전 순이익이 약 1544억원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지난 20일 기준으로 적용하면 SK이노베이션은 법인세 차감 전 순이익이 현재까지 692억원 감소한 상황이다. 정유업계는 파생상품 투자 등을 통한 '헤징(위험 회피)' 전략을 확대하는 한편, 생산 제품의 절반 이상을 수출해 환차익으로 일부 손실을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철강업계 역시 고유가의 영향을 피해가기 어렵다. 철광석·유연탄 가격이 유가 상승과 함께 동반 상승하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제조 비용이 급등하고 있다. 고유가가 이어지면 제철 공정에서 필요한 연료·가스 비용도 함께 오르기 때문에, 철강사들은 생산비 절감 노력에도 불구하고 톤당 원가 자체가 뛸 수밖에 없는 '비용 인플레이션'에 직면하고 있다. 일부 업체는 설비 가동률을 조정하거나 고부가 제품 비중을 높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타개책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석유화학업계는 고유가의 영향을 가장 복합적으로 받는 산업 중 하나다. 석유화학 제품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국제 유가와 연동되기 때문에 유가 상승분이 즉각 제조원가 증가로 이어진다. 그러나 글로벌 수요 둔화로 납사분해시설(NCC) 제품 가격을 충분히 올리기 어려워 마진 압박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더욱이 석화업계는 수출 감소와 외산 저가 제품 유입 증가, 내수 침체 등 구조적 요인까지 겹치며 업계 부담은 한층 커진 상황이다. 한국철강협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철강 수요는 10년 전인 2016년만 해도 8770만t이었지만, 감소세가 계속되면서 올해는 7360만t(추정치)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공급도 9670만t에서 7830만t으로 약 19% 줄었다. 수요·공급 모두 위축된 상황에서 고유가까지 덮치자 기초소재 산업 전체의 수익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고유가의 충격은 항공업계를 정면으로 강타하고 있다. 항공사는 전체 운영 비용의 약 30%가 항공유로 구성될 정도로 연료 의존도가 높은 산업이다. 대한항공의 경우 연간 예상 유류 소모량은 약 3060만 배럴로 알려졌다. 유가가 배럴당 1달러 변동하면 약 3050만 달러(약 420억원)의 손익변동이 발생한다.
여기에 고환율까지 겹치면서 부담은 배가된다. 항공사의 연료비·정비비·리스료 등 주요 비용 대부분은 달러로 지불되기 때문이다. 유가·환율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면 비용 상승 요인이 중첩돼 수익성 압박이 더욱 커진다. 특히 저비용항공사(LCC)는 항공기 임차 비중이 높아 부담이 더 크다.
항공권 가격 인상을 통해 일부 비용을 흡수할 수 있지만, 경기 둔화와 여행 수요 위축 가능성이 남아 있어 대폭 인상은 사실상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항공사들은 노선 재편, 부정기편 감축, 기재 효율화, 연료 절감 프로그램 확대 등 운영 최적화 전략을 강화하며 대응에 나서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환율·유가가 함께 오르는 구간은 산업 전반에 '이중 부담'을 주는 최악의 조합"이라며 "제조업은 원가가, 항공·물류업은 운영비가 동시에 뛰고 있어 이런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기업이 버티기 힘들 것이다.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위험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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