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아는 늘 새로운 선택으로 스스로를 증명해왔다. 소녀시대라는 그룹의 센터로 시작해 국민 걸그룹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배우로서도 자신만의 궤적을 그려왔다. 그의 커리어는 이제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수식이 필요 없는 지점에 와 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작품이 '엑시트'(2019)로 호흡을 맞췄던 이상근 감독의 신작 '악마가 이사왔다'다. 이 작품은 새벽마다 악마로 깨어나는 선지(임윤아 분)를 감시하는 기상천외한 아르바이트에 휘말린 청년 백수 길구(안보현 분)의 고군분투를 담은 악마 들린 코미디로 임윤아는 이번에 두 얼굴을 지닌 한 인물을 통해 낯선 지점에 발을 디뎠다.
그는 단순히 극적인 설정을 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결의 감정을 같은 이름 안에 담아내야 했다. 한 인물을 서로 다른 결로 나눠 표현해야 했던 만큼 촬영 과정에서 쌓인 감정의 밀도는 더욱 짙었고 완성된 영화를 마주하는 순간에도 그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영화를 처음 보니까 촬영할 때 기억이 막 떠오르더라고요. 제가 느꼈던 따뜻함, 감독님의 감성이 잘 묻어났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그런 부분이 잘 표현된 것 같아요. 특히 선지로서 길구를 바라보는 마음이 다시 떠올라서 뭉클했어요. 연기할 때의 감정들이 전이돼서 기억이 확 살아나더라고요. 관객으로서도 재미있게 봤어요.”
임윤아가 '악마가 이사왔다'에서 매력을 느낀 대목 중 하나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 두 캐릭터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낮의 선지와 화려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밤의 선지를 오가는 과정은 단순한 변신이 아니라, 배우로서 새로운 해소감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낮 선지와 밤 선지는 캐릭터가 180도 달라요. 그게 오히려 더 재미있었어요. 확확 바뀌는 재미가 있고, 한 작품 안에서 다양한 느낌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연기하면서도 흥미로웠어요. 밤 선지는 20살이라는 나이대가 있어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묻어나면 좋겠다 싶었어요. 감독님도 그런 부분을 강조하셨고요. 화려한 스타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이면에는 상처와 두려움에서 나오는 자기방어적인 모습이 있어요. 연기할 때 쑥스러움 없이 표현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선지라는 캐릭터에 몰입했다는 거겠죠. 다른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 좋았어요.”
선지가 낮과 밤, 두 모습으로 나뉘어 등장하는 만큼 길구와 맺는 감정의 결도 달랐다.
“양쪽 마음이 결이 달라서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밤 선지는 온전히 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고, 나라는 사람을 전부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이라고 느낀 것 같아요. 나의 이름을 진심으로 불러줄 수 있는, 유일한 단 한 사람이랄까. 사랑을 넘어서 애틋한 관계성이 형성된 느낌이 있었죠. 낮 선지는 조금 더 이성적인 감정으로 길구와 교류하는 부분이 있었고요.”
선지의 곁을 지켜주는 또 다른 축은 아버지 장수(성동일 분)였다. 어린 시절부터 밤마다 악마에 빙의된 딸을 품어온 존재이자, 오랜 세월을 함께 버텨낸 유일한 가족이기도 했다.
“악마 선지는 아빠와의 교감이 딸 이상의 관계였다고 생각해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그런 게 잘 표현된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같이 걸어온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요.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봐요.”
임윤아는 선지를 연기하면서도 자신과 캐릭터 사이에 겹쳐지는 면모를 자주 발견했다고 했다. 배우가 맡은 인물이 낯설지만은 않았던 이유다.
“낮 선지나 악마 선지나 결국 제가 가지고 있는 부분들이 있어요. 제가 선택해서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어느 정도 닮아 있는 지점이 있거든요. 악마 선지에는 평소 친구들이랑 있을 때의 텐션 높은 에너지, 또 제 안에 있는 여러 모습들이 다 복합적으로 담긴 것 같아요. 다른 점이라면, 평소에는 표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순간이 그렇게 많진 않다는 거죠.”
임윤아에게 이번 작품은 ‘엑시트’에 이어 이상근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춘 두 번째 작업이다. 2019년 942만 관객을 모은 전작이 재난 상황 속 인간적인 유머와 온기를 담았다면, 이번에는 인물들의 감정선에 보다 깊이 집중했다. 임윤아는 두 번째 만남인 덕분에 현장에서의 호흡도 한결 빠르고 수월했다.
“경험이 쌓였다고 해도 현장에 가면 늘 긴장되고 고민돼요. 그래도 감독님과 두 번째 작품이다 보니 표현이나 디렉션을 빨리 이해할 수 있었어요. 시나리오만 봤을 땐 궁금했던 부분들도 감독님과 얘기하면서 금방 풀렸고, 캐릭터 구축도 훨씬 빨랐죠. 저에게 이 작품을 주셨을 때 ‘전작을 같이 했으니까’보다는, ‘이 캐릭터를 꼭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이번 작업도 감독님에게 배운 게 많았어요. 감독님이 계셔서 더 의지할 수 있었죠. ‘엑시트’가 제 첫 주연작이자 감독님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해서 서로 데뷔 동기라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래서 더 공감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안보현이 연기한 길구라는 인물은 선지를 감싸 안는 따뜻함으로 완성됐다. 카리스마 있는 인물을 주로 선보였던 안보현은 이번 작품에서 순박하면서도 믿음직한 얼굴을 내보였다. 선지 곁에서 묵묵히 힘이 되어주는 모습은 임윤아에게도 자연스러운 몰입을 이끌어냈다.
“안보현 씨가 길구 캐릭터를 정말 잘 소화했다고 생각해요. 촬영할 때도 느꼈지만 영화를 보면서도 길구가 굉장히 사랑스럽게 느껴졌거든요. 늘 강인한 이미지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순박하고 따뜻한 캐릭터가 너무 잘 어울렸어요. 첫 리딩 때부터 ‘길구라면 이렇게 말하겠구나’ 싶을 정도로 잘 맞아떨어졌죠. 선지를 지켜주고 케어해주는 듬직한 모습도 좋았어요.”
2007년 소녀시대로 데뷔한 지 어느덧 18년. 무대 위 센터에서 스크린과 브라운관의 주연으로 이어온 시간 동안 뚜렷한 논란 없이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무대와 스크린을 오가며 쌓아온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는 소녀시대라는 사실이다.
“저는 큰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눈앞의 상황을 하나하나 헤쳐나가는 스타일이에요. 그렇게 쌓이다 보니 지금 돌아봤을 때 잘 걸어온 길처럼 보이는 것 같아요. 그냥 저답게 해왔을 뿐인데 지켜봐 주셔서 감사해요. 개인 활동이 많아 다 같이 모일 기회는 많지 않지만, 최근에는 티파니 언니 생일 겸 모였어요. 18년이라는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싶더라고요. 자주 보지 못해도 변함없는 관계성, 애정이 있죠. 아직 구체화된 건 없지만 20주년은 어떻게 보낼까 이야기도 나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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