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백조의 날갯짓에 담긴 사랑과 파멸 [D:헬로스테이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07.03 12:14  수정 2025.07.03 12:14

ⓒLG아트센터

근육질의 백조 무리가 힘찬 날갯짓을 펼친다. ‘백조의 호수’는 마법에 걸려 밤에는 백조로 변하는 ‘공주’ 오데트와 지그프리트 왕자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원작에 따라 줄곧 백조 역할이 발레리나 차지였던 것과 달리, 메튜 본의 ‘백조의 호수’에선 남자 백조가 등장한다. 기존의 무대 속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흔들어 놓은 셈이다.


세계적인 안무가 매튜 본이 창작한 ‘백조의 호수’는 고전 발레 작품 ‘백조의 호수’를 바탕으로 한다. 1995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하며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1996년 영국의 권위 있는 공연예술상인 올리비에상, 1999년 미국의 연극·뮤지컬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2003년 초연을 포함해 다섯 차례 공연하며 1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번 내한 공연은 2019년 이후 6년 만으로 ‘백조의 호수’ 30주년 기념 순회공연 일환으로 열렸다.


고전 발레의 우아한 백조를 근육질의 남성 백조로 탈바꿈시키며 무용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LG아트센터에서 진행된 이번 내한 공연에서도 그 독보적인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차이콥스키의 웅장한 선율은 그대로 유지된 채, 현대 영국 왕실로 배경을 옮겨 사랑을 갈구하는 유약한 왕자와, 그가 갖지 못한 강인한 힘과 아름다움, 자유를 상징하는 ‘백조’를 등장시켜 가슴 아픈 드라마로 탈바꿈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나약한 왕자가 있다. 강인하고 매혹적인 여왕인 어머니는 아들이 왕가의 후손답게 성장하기를 바라지만, 왕자는 그런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끊임없이 좌절한다. 어머니는 왕자가 사랑하는 여자친구마저 왕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하고, 이는 왕자를 더욱 깊은 절망 속으로 밀어 넣는다.


ⓒLG아트센터

방황하던 왕자가 술에 취해 찾아간 바에서 여자친구가 사실은 왕위를 노리는 비서의 계략에 의해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고, 삶의 의미를 잃은 왕자는 자살을 결심하고 물속으로 뛰어들려던 순간,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힘’과 ‘카리스마’를 지닌 존재, ‘백조’를 만난다. 백조가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은 왕자에게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부여하고, 그는 다시 왕실로 돌아온다.


하지만 왕자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왕실 무도회에서 왕자는 백조와 똑같이 생긴 낯선 남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유혹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큰 혼란에 빠진다. 이는 비서의 또 다른 계략이었지만, 왕자는 낯선 남자와 어머니가 결혼할 것이라는 거짓 소문에 질투심에 휩싸여 어머니에게 총을 겨누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 이후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왕자는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백조의 품에 안겨 죽음을 맞이하고,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어머니는 비탄에 빠진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화려한 무대 속에서도 가장 압권은 호수를 배경으로 펼치는 남성 무용수들의 군무다. 강인하면서도 동시에 위협적인 남성 백조들의 군무는 왕자를 유혹하고, 때로는 그의 목을 조르듯 억압하며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왕자의 억압된 욕망과 광기를 백조들의 군무로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사랑과 자유를 갈망하지만 번번히 벽에 부딪히는 왕자의 모습은, 결국 파멸에 이르는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꿈과 현실, 욕망과 좌절, 그리고 치명적인 사랑과 파멸이 교차하는 왕자의 심리는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단순한 발레를 넘어선 심리 드라마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작품은 단순한 파격에 그치지 않고, 사랑과 파멸이라는 인류 보편의 테마를 강렬한 이미지와 압도적인 춤으로 그려내며 관객들에게 깊은 충격과 여운을 남긴다. 이 작품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전 세계를 매료시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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