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했다고? 아냐, 일본만은 이겨야 해

입력 2009.03.26 09:09  수정

<그리운 나라, 박정희>한국사람은 일본과 경쟁할때 능력 증가

한국의 불행은 박정희 뒤로 일본 따라잡자는 지도자 없다는 것

WBC대회를 링컨과 이승만이 보았다면…

“내가 죽더라도 야구는 죽이지 말아야 해.”

미국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의 말이다. 불의의 저격을 당해 운명하기 직전에 링컨은 이런 유머를 유언처럼 남겼다고 한다.

때로 짤막한 유머 한마디는 명연설 못지 않은 위력을 발휘한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도처에 널려 있던 1954년, 한국 축구선수들은 스위스월드컵 예선에 참가하게 되어 경무대의 대통령에게 출국 인사를 했다.

이승만 박사는 일본팀에게 꼭 이기기를 당부하면서 뼈있는 유머 한마디를 했다.

“일본에게 패하면 현해탄에 빠져 죽어야 해.”

가볍게 던지는 유머 한마디가 천근의 무게로 다가올 때는 웃음이 나지 않는다.

야구의 나라, 미국 LA에서 벌어진 제2회 WBC대회를 천상의 링컨이 내려다보았다면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지난 24일 벌어진 한국 대 일본의 결승전을 천상의 이승만이 보았다면 “에이, 이 사람들!”하고 혀를 끌끌 차지 않았을까. 박살이 나도록 두둘겨패주기를 바랐을 텐데….

한국 야구 준우승만도 참 잘했다고, 괜찮다고, 먹고 살기 힘든 세상살이를 잠시 잊고 눈살 찌푸려지는 꼴들도 잠시 안 보고, 서로 못잡아 먹어 으르렁거리던 것들도 모처럼 한마음이 되어 며칠동안 즐거웠으니 고맙다고 말들을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패배의 속쓰림이 덮어지지는 않는다. 상대가 미국이나 다른 나라였다면 준우승의 기쁨으로 패배감은 쉽게 지워질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아 한국 야구의 준우승이 큰 성과임에는 틀림없으나, 상대가 일본이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다.

역사의 악연은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과의 대결에 꼭 이겨야 하겠다는 승부욕이 발동하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옛날에 비해 엄청나게 달라지고 잘살게 되었다고 스스로 대견스러워하고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외국 경기장에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가슴에 파고드는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고, 승패를 주고받는 스포츠라도 일본과 맞붙을 때의 감정은 또 왜 그리 달라지지가 않는 것인지….

1미터68의 우리 누이들이 1미터90의 서양 꺽다리들을 이겼을 때

야구가 딱딱한 공을 방망이로 때리고 뜀박질하는 놀이만은 아니다. 스포츠란 것이 대중을 즐겁게 하는 단순한 승부 게임만은 아니다. 스포츠는 곧 선수의 인생이고, 국민의 사기를 좌우하는 싸움이며, 때로 정치외교력을 넘어서는 위력을 떨친다.

남에게 이기려면 기술도 기술이지만 우선 잘 먹어야 체력이 따라주므로 어렵게 살던 지난 시절에는 “체력은 국력”이라고 했다.

그 시절 힘겨운 삶을 위로해주고 기쁨을 준 스포츠가 여자 농구와 남자 축구였다. 이 두 종목에 관한 한 일본은 우리의 ‘밥’이었다. 일본을 이길 때마다 온 국민이 환호했다.

남자 축구는 아시아에서 큰소리를 쳤지만, 여자 농구는 1967년 4월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해서 온국민을 열광시켰다. 우리 스포츠가 세계무대에서 변변히 이겨보지 못하던 시절이라 그것은 한국 야구의 WBC 준우승과 비교할 수 없는 국가 경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고 목이 메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때 우리 여자 농구선수들의 평균 신장이 1미터68센티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종목도 아니고 키싸움을 하는 농구선수들이 그랬으니 오죽했을 것인가.

1미터68은 더 설명이 필요치 않은 한국의 현실이었다. 키 작은 우리 누이들이 박달나무처럼 단단한 몸집으로 1미터90이 넘는 서양 꺽다리들의 숲을 헤치고 악착같이 싸워 거둔 준우승 성과가 한국이 세계대회에서 구기종목 사상 처음 따낸 메달이었다.

그때 우리 누이들 중 최장신이 1미터76의 주장 박신자였다. 요즘 젊은 여성들이 신랑감을 고를 때 기본적인 신체조건밖에 안되는 신장이었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의 눈물겨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선수단은 한국 스포츠사상 처음 김포공항에서 서울운동장까지 20킬로 거리를 카퍼레이드로 이동해서 3만명이 모인 서울운동장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체코대회에서 MVP 영예까지 안고 돌아온 박신자는 ‘대한민국의 꽃’으로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그해 26세의 박신자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일본을 64대43 큰 스코어 차로 눌러 우승을 차지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접으면서, 얼마후 은퇴경기를 치르고 청와대의 초대를 받았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스포츠 스타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도움을 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박신자가 소속된 상업은행팀이 일본과 대결하는 동남아여자농구 경기를 장충체육관에 나가 관전할 정도였다. 농구 팬이거나 박신자의 팬이어서가 아니다. 역경을 딛고 선전하는 장한 투혼에 박수를 보내고, 일본을 보기좋게 물리치는 것을 직접 보고 싶었을 것이다.

보릿고개 시절에는 하나같이 헝그리 정신으로 뛰어야 했던 선수들이 은퇴 후 비참한 말로를 맞는 경우가 허다했다.

체코대회에서 박신자와 함께 뛰고 돌아온 제일은행 소속의 한 선수가 생활고에 허덕였다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가난에 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청와대 비서관이 찾아가 금일봉을 건네며, 용기 잃지 말라는 대통령의 말을 함께 전했다.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어린 세대에게는 꿈을 주며, 그리고 국위를 선양해준 선수들이 그래서는 안되겠기에 대통령 박정희는 그들을 챙겨주었다.

박신자는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 농구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88서울올림픽 때에 조직위원회 임원으로 활약했고, 1999년 미국 테네시주 락스빌에서 세계여자농구 ‘명예의전당’이 문을 열었을 때 아시아인으로 유일하게 헌액되었다.

박신자 개인의 영광이며, 한국 스포츠의 자랑이다. 박신자를 길러낸 텃밭이 있기에 국가 브랜드 가치도 높일 수가 있었다.

“체력은 국력”은 6070시대의 스포츠를 상징하는 구호였다. “잘살아보세”도 따지고 보면 체력과 국력을 키우자는 염원의 화두(話頭)였다. 그 간명한 화두가 곧 국가경영의 방향이었으며, 국민은 거기에 삶의 목표를 맞추어 모진 일에 땀과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경제성장에 따라 체육재정 규모가 확대되고 태릉선수촌, 종합경기장 등의 스포츠 인프라 구축이 이루어져 이후 88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 WBC야구의 성과도 가능했다.

스포츠는 자본주의 게임이다. 아마추어나 프로를 막론하고 경제력의 뒷받침이 없이는 남에게 앞서갈 수가 없다.

WBC의 성과도 6070시대의 고교야구 전성기를 빼고는 그 태동과 성장 배경이 설명되지 않는다.

박 대통령 내외는 박신자 선수(육영수 여사 오른쪽)가 은퇴경기를 치른 다음날인 1967년 11월 3일 그를 초대해 그동안의 노고와 성과를 치하했다.

대통령의 스트라이크 시구(始球)

그 시절 고교야구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해인사 암자에서 고승 성철을 시봉하던 상좌승이 서울에 심부름을 왔다가 동대문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모교의 야구경기를 지나치지 못해 관중석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가 여느 관중과 다름없이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온갖 몸짓으로 응원을 하니 TV중계 카메라가 이 이색적인 모습을 놓칠 리 없었다. 해인사 암자의 상좌들이 TV 앞에 모여 있다가 “어, 저봐라”하고, 성철이 “저놈이 와 저기 있노?”하는데도 돌아오면 야단맞을 걱정에 앞서 웃음부터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원택 지음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수행하는 승려도 참을 수 없었던 고교야구의 열기가 시작된 것이 1967년이라 한다. 그해 4월 동대문야구장에서 야간조명 아래 최초로 벌어진 제1회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가 바로 고교야구 전성기의 개막전으로 알려져 있다.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기여서 그날 박정희는 춘천유세를 마치고 돌아와 주최측에 순금과 순은으로 된 대통령배를 전달하고 직접 시구(始球)를 하러 나섰다.

(이 내용은 필자의 블로그에 올렸다가 어느 때 블로그 내용물을 모두 삭제했는데 그 사이 여기저기로 삽질들을 해가서 임자 없이 떠도는지라 필자의 마음이 안좋다. 어쨌든…)

양복 윗도리를 벗고 조끼 차림에 모자를 쓰고 투수 마운드에 나온 대통령은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투수 폼으로 공을 던졌다.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훨씬 벗어났지만 타자는 관례대로 헛스윙을 했고 구심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마운드를 내려가지 않고 구심에게 공을 한번 더 달라고 했다. 다시 던지겠다는 것이다. 시구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두번 시구를 했다. 두번째 공은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을 정확히 가르고 포수 미트로 빨려들어갔다.

“스트~라이크!”

구심의 힘찬 외침과 함께 관중의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은 구심에게 “이번에는 진짜 스트라이크 맞죠?”라고 물어 확인을 하고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만족한 제스처를 취했다.

화제의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는 중앙일보가 동양방송과 공동 주최해서 활발한 중계방송으로 더욱 팬들을 열광케 했지만, 농촌에서는 라디오나 흑백 텔레비전을 듣고 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1967년 당시 전국의 농가에 15퍼센트만이 전기가 가설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등잔불을 켜는 실정이었다.

동대문야구장의 조명도 그 전해인 1966년에 가설된 것이었다. 1963년 우리 아마 야구팀이 서울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꺾고 우승했을 때 야구계의 소원이 조명시설이라 하므로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약속을 했던 것인데, 예산을 책정해 놓으면 풍수해 복구 같은 발등의 불을 끄는 데 쓰여지는 등 우여곡절로 미루어지다가 3년 만에 겨우 가설을 했었다. 그랬더니 “가뜩이나 전력이 부족한데 왜 밤에 불을 켜고 야구를 하느냐”는 비난에다가, 가난한 야구계에서는 전기 사용료가 너무 비싸다고 울상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러했지만 그 시절의 산업현장은 열정으로 들끓었다. 설레는 꿈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더불어 스포츠 열기도 뜨거워, 비싼 전깃불을 켜고 시작한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는 고교 선수들에게 ‘꿈의 제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 신문기자는 중학생 시절이던 그때 대통령이 야구장에 나와 시구하는 모습을 “3만명 가까운 인파의 틈에서 까치발을 하며 그라운드를 내려다보아야 했다”며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는 박 대통령의 모습은 어린 야구팬에게 평소의 엄격한 이미지를 벗고 상당히 친근감을 심어주어 오래 잊혀지지 않는다”고 썼다. (1995년 4월 20일 한국일보)

“한국인은 일본에게 악착같이 싸우는 ‘플러스 알파’가 있다”

한국 야구사상 두번 시구를 한 사람은 대통령 박정희뿐이라고 한다.

그는 공이 빗나간 첫번째 시구를 왜 참을 수 없었을까. “쇼는 싫다. 왜 볼을 스트라이크라고 하는가”라며, 일거수일투족이 어떤 목표를 향해 빗나가는 것을 그냥두지 않겠다는 고집이 아니었을까. 꼭 스트라이크를 넣겠다는 것은 아마도 그 자신이 시대적 과제와 국가경영의 목표를 향해 정확히 투신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의지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박정희의 대한민국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제2차 계획(1967~1971)이 시작되던 그해 전문가들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수출 3억달러 돌파를 향해 자신감있게 달려가고 있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포항제철을 기공하고, 전자산업 육성 계획과 국가예산의 4분의1에 달하는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한편, 현충사를 보수 확장하는 등 문화재 정비사업도 하면서 패기만만한 기세로 경제 도약의 가파른 상승 그래프를 그려가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의 집무실은 온갖 국정 현황 그래프로 도배되어 있었다. 식당과 침실에까지도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외무부장관 이동원은 한국과 일본의 각 부문별 경제력을 비교한 그래프가 상당히 많은 것을 보고 “각하, 왜 하필 일본과 비교하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대답은 간단했다.

“일본을 따라잡아야 돼.”

그때가 60년대 중반. 지금이야 국제경기에 출전하는 우리 선수들은 물론 서포터즈들도 전세기를 탄다고 하지만 그 시절은 나라에 국적기 한대가 없어 대통령이 서독에 가서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날 때 서독 여객기를 빌려 타야 했고, 간신히 동대문운동장에 야간조명을 설치하고 전력부족으로 고생이 막심하던 실정에 언감생심 일본을 따라잡겠다니!

박정희는 그런 지도자였다.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현대조선 모두가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한국인이 박정희의 미래개척 의지와 역사 안목을 알고 비로소 그의 사심없는 국가경영에 머리 숙이게 된 것은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는 서양문물을 도입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긴 얘기를 하면서 아시아에서 서양을 이긴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고 했다.

“일본이 서양문물을 배워 서양을 이겼으니, 우리는 일본을 배워 일본을 이겨야 해.”
이것이었다.

그는 일본보다 앞선 한 부문의 그래프 앞에서 산업현장을 시찰하는 것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됐어, 잘하는구먼.”

아주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이동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사람은 일본과 경쟁을 붙여야 해. 그래야 악착같이 달라붙어 본래 능력 이외의 알파(α)가 나오거든.” (중앙일보 <실록 박정희>)

우리는 알고 있다. 일본과 싸울 때 남다른 승부욕이 불끈거리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다. 박정희가 말하는 플러스 알파의 능력, 일본을 만나면 강해지고 독해지는 바로 그것이 역사의 악연으로 만들어진 한국인의 유전형질임을 우리 자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2006년 제1회 WBC대회에서 일본을 연파하고도 대진운이 나빠 준결승에서 일본에게 패해 4강에 그쳤지만,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일본 야구를 이기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지난 24일의 제2회 WBC대회 결승에서 일본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독한 승부욕이 있기에 분패의 쓰라림도 컸고, 그러나 언제라도 다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우리는 갖고 있다.

야구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일본만 만나면 투지가 불타는 한국이 어찌하여 흑자를 내지 못하고 있는 대일본 교역의 적자 행진을 뒤집어버리겠다는 의욕은 없는 것일까. 일본보다 잘사는 나라, 세계 1등국가로 가는 길은 아주 가까이 있다. 일본을 넘어 1등국가로 가는 목표를 제시하고 “나를 따르라”고 나서는 리더십은 왜 없는 것일까.

박정희 시대 18년은 꿈의 세월이었다. 국민에게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은 ‘한강의 기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박정희의 18년은,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정치인들이야 경악해 자빠질 노릇이겠지만, 일본을 따라잡기에 너무 짧았다. 그의 역사 소임은 끝났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한국의 불행은 박정희 뒤로 “일본을 따라잡아야 돼”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유전형질이 있음에도 왜 그런 꿈의 지도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꿈을 주는 지도자의 기다림,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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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모임(http://www.516.or.kr/)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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